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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도서]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저/함규진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1점

제목 : 공정하다는 착각

저자 : 마이클 샌델

출판사 : 와이즈베리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저/함규진 역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

'정의가 무엇인가'란 책으로 우리 나라에 많이 알려진 작가이다. 아직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정의란 무엇인가'는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고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내용이지만, 결론과 무관하게 앞서 정의에 대한 다른 철학자들의 소개와 예시가 너무나 빼어난 글로 잘 쓰여졌기에 대중들에게 잘 읽힐 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그 후 10년이 지난 2020년, 현대 사회의 능력주의는 과연 공정한 제도인가에 대한 내용을 들고 왔다.


내가 어릴 때 수학능력시험에서 단체로 컨닝을 하다 걸린 사건이 있었다. 핸드폰을 사용해 수십명이 조직적으로 컨닝을 시도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2019년 미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명문대를 가고 싶어하지만 실력이 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답안지를 조작하거나 운동 특기생 자격으로 입학을 시키는 등 조직적인 비리가 벌어졌다.

 

우리나라는 불법이지만 미국은 기여입학제가 있다. 기부금을 내는 사람의 입학을 허용하는 것이다. 형평성의 문제가 발생하지만 대학도 결국 수익을 내야 하는 사업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가능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수학능력시험과 미국의 SAT는 모두 공정하게 노력해 스스로의 실력의 결과를 얻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비리 문제의 경우는 얘기가 다르겠지만 만일 비리가 없다면? 유복한 집안에서 과외를 받고 기출예상문제를 풀어가며 부족한 부분을 강화하는 훈련을 받은 아이와 가난한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문제집을 사서 보는 아이는 정당한 경쟁을 하는 것일까?

 

현대 사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인류 역사상, 문명을 이룩한 이래로 가장 평등한 사회라고 생각할 것이다. 과거 신분제가 있던 시기(대부분의 문명에서 존재했음)에는 신분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아 태생적으로 왕족이나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출세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으로 훌륭한 대학에 들어가고 사업에 성공해 큰 돈을 번다면 상류 사회에 들어갈 수 있다.

 

과연 옳은 이야기일까?

 

현대의 능력주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도 부자가 되거나 국회 등 지배 계층으로 가는 길이 분명 존재한다. 내 능력과 노력의 결과 얻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의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능력주의는 계급제도가 타파되고 평등한 사회의 기본으로 생각된다.

 

저자는 이 능력주의과 과연 옳은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수십년간 빈부격차는 점차 심해지고 있고, 대학 입학, 국회 의원의 비율을 보았을 때 상위 소득 가정의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할 확률이 높고, 학력이 높고 명문대 출신이 국회 등 상류 사회로 진출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아이비리그 대학생 2/3가 소득 상위 20% 이상의 가정 출신이라고 한다. 의회의 경우는 더 심한데 미국 상원 의원의 100%, 하원 의원의 95%가 대졸 학력자이다. 이는 실제로 사다리는 통해있지만 사다리를 오르는 것은 어려운 현실을 말하는 것일까?

 

능력주의는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생긴다. 현 체제에서 성취는 나 스스로 이뤄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승자들은 승리를 자기 노력의 결과라 여길 수 있다. 그렇다는 것은 패자는 자기가 못했기 때문에 패자가 된 것이고 국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마이클 영은 이런 말을 했다. 계급이 없이 능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성공은 당연한 보상으로, 실패는 자기 자책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능력주의는 사회적 불화를 불러오는 제도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능력주의는 현재까지는 가장 공정하고 효율적인 제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런 능력주의의 시작을 성서에서 찾고 있다. 크리스트교에서 신은 정의롭고 전능하다. 하지만 악은 존재하고 있다. 전능한 신이라면 이러한 악도 존재하지 않도록 할 수도 있을텐데 이런 악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도입했다. 인간의 의지에 따라 선하게 살 수도, 악하게 살 수도 있기 때문에 옳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 교황 중심의 카톨릭 사회에 부패가 만연하며 종교 개혁이 일어난다. 루터는 면죄부에 반대했다. 구원 받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자체가 신성 모독이라는 것이었다. 칼뱅 주도로 일어난 종교 개혁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달랐다. 구원 여부는 미리 알 수 없고 미리 알아서도 안된다는 교리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돈에 구애받지 않고 직업에 매진하는 것을 구원의 증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사명으로 삼았다. 이것이 발전하여 세속적 성공이 결과적으로 구원 받은 사람의 징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칼뱅파의 메세지는 명확하다. 세속적 성공은 구원 받은 사람의 징표이다. 이는 성공한 사람은 그럴 만해서 성공했다는 능력주의의 원칙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런 섭리론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말에서 그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미국은 선하기 떄문에 위대하다

나는 역사의 옳은 편에 서 있다



 

능력주의의 단점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 복지의 리스크를 정부와 기업에서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누구나 열심히 규칙대로 일한다면 사회적 상승을 한다는 '약속'을 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능력주의의 결과 차이가 공고해질 수도 있다.

 

게다가 유해한 면도 존재한다. 노골적으로 불평등이 이어지고 패자의 원인을 그들에게서 찾다보니 승자와 패자의 공동체 의식이 감소하고 사회적 연대가 약화될 수 있다. 또한 학력주의가 점차 심해지고 학력이 낮은 사람들의 노동의 가치와 명예가 점차 감소한다는 데 있다.

 

능력주의의 맹점은 바로 이 교육에 있다. 근대화가 시작되고 계급 제도가 없어지면서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기회의 평등의 개념에서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교육 받지 못하면 다른 길로의 전환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육은 우리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나? 50년 전과 비교해 미국과 우리나라 모두 대학 진학률이 늘어났다.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성은 증가하였다. 하지만 사업가와 노동자의 빈부격차는 더 늘어났고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은 늘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인가?

 

미국의 정치 지지자의 변화를 보자. 1940-70년대 비대졸자는 민주당 지지자가 많았다. 1990년대 클링턴 대통령 이후 민주당은 능력주의를 주장했고 2000년대 이후 좌파 정당은 비대졸자의 지지를 잃어버렸다. 이제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는 중도좌파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노동자들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와 별개로 부유한 유권자는 우파를 지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단순히 백인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흑인, 라틴계, 아시아계도 과거에는 민주당 지지자가 많았으나 이제는 학력이 선택의 주요 기준이 되고 있다. 노동자를 대표해 정의와 평등을 외치던 민주당이 능력주의를 주창하자 엘리트들만 지지하는 아이러니함이 생겼다. 실제로 힐러리 클링턴과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에서 학력이 높은 50개 선거구에서 힐러리는 48군데에서 승리했고 반대의 경우는 결과도 반대로 나왔다.

 

이 결과만 놓고 본다면 결론은 명확하다. 능력주의는 보편적인 노동자들을 위한 제도가 아닌 것이다. 고학력 엘리트들의 입맛에 맞는 제도라는 결론이 나온다.

과거 계급제 사회에서 성공은 출생에서 결정된다. 현재는 자신 스스로 일궈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반대로 실패한 사람들은 엘리트에 대해 분노와 자격지심을 가지게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마이클 영은 이런 말을 했다.

....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층민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근거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능력주의의 최고의 맹점은 실제 출발선이 다르다는 점이다. 하지만 만약에 가정 형편 등 모든 조건이 일정하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완전히 공평한 조건을 가정하더라도 능력주의의 이상은 정의롭다고는 볼 수 없다. 능력대로 대가를 가져가는 사회는 지금보다도 더욱 극심한 빈부격차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의 능력,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재능은 일종의 운으로 볼 수 있다. 재능은 노력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 생기는 행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받는 사회에 태어난 것도 행운이다. 르브론 제임스나 리오넬 메시가 중세시대에 태어났으면 (물론 운동 신경이 좋아 훌륭한 전사가 됐을 수도 있지만, 덩치가 작은 메시는 힘들었을 수 있고, 당시는 신분제 시대이기에 운동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농구와 축구가 없는 시대에서 지금처럼 부를 누리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결국 이뤄낸 사람의 노력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노력만으로 이루는 것은 한계가 있다. 결국 타고난 재능이 필요한 부분이 생긴다.

 

능력주의의 대안으로 나오는 이론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자유시장 자유주의

자유 경쟁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모든 사람은 다른 조건을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시장 논리에 맡기자는 사람들이다. 평등, 재분배 등은 '자유와 정반대되는 계획'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정의로운 사회'의 기본 논리와는 너무도 맞지 않는다.

 

복지국가 자유주의

능력주의는 능력과 재능에 따라 불평등이 존재하고 이는 정의롭지 않다. 승자는 경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불운한 사람들과 승리의 과실을 나눠야한다.

 

이 두가지 이론은 정 반대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력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재능의 도덕적 자의성을 강조하며, '시장에서의 결과가 능력이나 자격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을 배격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재분배를 반대하는 입장과 찬성하는 입장이 있을 뿐이다.


현대의 대학은 능력주의의 시작과 함께 더욱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초 미국 대학은 부유층 출신의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흑인과 유태인은 있어도 정말 소수 입학이 '가능'했을 뿐이다. 그와 비교하면 지금의 실력으로 입학하는 것은 엄청난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제 시간이 흘러 소득에 따른 계층화를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대학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고 있다. 소득 최하위 5분위에서 최상위 5분위로 올라가도록 성공한 학생들의 비율을 각 대학별로 조사해보면 명확해진다. 하버드 출신의 경우 1.8%, 프린스턴 대학은 1.3%에 불과했다. 다른 대학들도 비슷한 실정이다.

 

여기서 저자는 대학 입시의 대안을 제시한다. 어느 정도 기준 안에 속하지 않는 인원을 일부 솎아내고 기준 내의 인원 중 제비뽑기로 선택하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랜덤으로 입학자를 정하는 것이 결국 명문 대학의 권위를 낮출 것이고 학력에 대한 경쟁이 약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과연 대학, 학생과 학부모, 졸업생, 정부 중 누가 찬성할지 너무 궁금한 주장이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학력주의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의 존엄성을 다시 세우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일의 존엄성이 높아진다면 고학력자와 심리적, 경제적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주창한 노동론은 두가지를 바탕으로 한다. 최저 임금을 보장해야 하고 모든 근로 활동에 있어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점이다.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길이 될 수 있다.

 

현실적인 대안도 제시한다. 저임금자의 급여세를 줄이고, 금융거래세와 재산세를 강하게 부과하는 방향으로 세제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굴러가는 금융 시장에 강력한 세금 제약이 들어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공황이 오진 않을지 심사숙고와 계산이 필요하다.

 


저자는 존 롤스의 정의론과 다소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서 공동체로서의 삶을 중시한다. 이 책에서도 지속적으로 느껴진 부분은 빈부격차의 심화가 사회에 약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해결하려 노력한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너무나 공정하다고 여겨지는 능력주의, 그 바탕인 학벌조차 얼마나 공정한지 따져보고 있다.

 

문명 이래 계급제가 대부분의 문명 사회에서 없었던 시기는 이제 100~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즉, 이제야 공정함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저자는 능력주의가 계급을 고착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난 좀 더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떤 주장, 어떤 제도든 시간이 지나면 폐혜가 생기기 마련이다. 과거만 봐도 그렇다. 고려 시대 과거제를 시행해 실력 좋은 귀족 자제를 등용하는 제도는 정말 참신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폐혜가 생겼고 무신들의 반란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 세력도 과거 제도로 실력 위주의 선발을 했지만 조선 초기가 지나고 문제가 생겨났고 지방 서원을 중심으로 하는 유생 집단인 '사림'이 신흥 세력으로 떠오르지 않았나. 그마저도 시간이 지나 주류가 되고 당파 싸움을 하여 정치를 어수선하게 만들기도 했었고.

 

빈부격차가 너무 벌어지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나는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된다면 자유로운 경쟁이 역동적인 사회를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너무 과도한 규제는 학교에만 앉혀놓고 학생들의 창의성을 없애는 행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과거 모든 사람이 잘 살자고 주장한 공산주의는 어떻게 됐나? 100년도 버티지 못하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실패한 정치 이론으로 남고 말았다.

 

결국 어떠한 방향에서 공정함을 이야기하더라도 사람의 욕망, 남보다 우월하고 싶은 욕구를 이겨낼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욕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잘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의란 무엇인가'보다는 다소 상세하고 그래서 더욱 난해한 주제였다. 그렇다보니 내 의견도 더 없고 지금 하는 얘기도 자신이 없게 생각된다. 하지만 능력과 학력 위주의 사회가 공평하다고는 생각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 출발선이 다르다고 많이 지적을 했는데, 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이보다 공정하고 효율적인 제도는 나오지 않았지만, 어떤 제도가 인간 사회를 발전시키는 제도로 사회에 등장할지 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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