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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 동백

[도서] 붉은 눈, 동백

송찬호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오랜 방황과 모색 끝에 오래도록 책들이 썩지 않고 노래가 죽지 않는, 시의 천축국에 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열망"(시집 뒷면의 시인 후기)이 이 시집을 끌고 가는 에너지라고 한다면, 그 에너지-열망의 꽃핌이 바로 시집 제목인 '동백'이다. '동백'은 이 시집을 관통하면서 등장하여 독특하게 의미화되고 있는데, 더 나아가 특유한 상징을 성취하기까지 한다. 시의 천축국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열망이 만들어 놓은 환상적인 '하나의 세계'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상징하는 것이 바로 동백이라고 한다면, 동백을 드러나게 하는, 동백 배후의 구축된 '하나의 세계'를 '산경'이라고 할 것이다. 이 시집은 이 '산경'을 향해 가는 여러 가지 길을 몽상하는 시편들이 주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시의 천축국에 대한 열망이 산경이란 환상 세계를 찾아나서는 고행으로 실천되게 되었을까? 그는 열망이 결국 '기적처럼' 현실화될 것을 믿고 있다. 그 현실화는 물론 환상이다. 하지만 그 환상은 시인 자신을 바꿀 것이다. 무슨 말인가? 다음의 시를 보자. "촛불도 없이 어떤 기적도 생각할 수 없이/나는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그때 난 춥고 가난하였다 연신 파랗게 언 손을 비비느라/경건하게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었다/그런데 얼마나 손을 비비고 있었을까/그때 정말 기적처럼 감싸쥔 촛불이 켜졌다/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 있고 어둡게 보였겠지만/젊은 날, 그때 내가 제단에 바칠 수 있던 건/오직 그 헐벗음뿐, 어느새 내 팔도 훌륭한 양초로 변해 있었다/나는 무릎을 끓고 어두운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어깨에 뜨겁게 흘러내리는 무거운 촛대를 얹고"(<촛불> 전문) 무슨 기대를 하고 제단에 나아간 것은 아니었겠지만, 시인은 무엇인가 기도하기 위해 제단에 나아갔으리라. 그 기도는 절박한 것이었을 게다. 시인은 '춥고 가난하였'던 것이다. 그 황량한 심신은 '손을 모으고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주체하기 힘든 상황 속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촛불도 없는 제단이지만 그 앞에라도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겠는가. 이 절박함 속에서의 기도, 아마 빛과 열을 달라고 할 그 기도는 시인도 놀라도록 거짓말같이 이루어진다. 그 기적은 시인 자신이 촛불이 되어버림으로서 달성되는 것이다. '바칠 수 있던 건/오직 그 헐벗음뿐'일 정도로 곤란한 상황 속에서 시인의 열망이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그 열망은 시인 자신을 열망에 맞게 존재 변이를 시켜 열망을 이루게 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적'이지 않다. "주위에서 누가 그걸 보았다면, 여전히 내 손은 비어 있고 어둡게 보였"을 것이다. 시인 자신이 촛불이 된다는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의 세계에선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팔이 양초로 변해 있다는 거짓말, 하지만 시의 세계에선 그것이 진실이 될 수 있다. 열망 속에서 이루어낸 기적, 촛대가 된 시인은 바로 시 자체이다. <촛불>에서 볼 수 있듯이 송찬호 시인에게선 바로 열망이 만들어낸 환상의 현실화가 바로 시가 될 것이다. 이 시집에서 시인의 열망이 만들어낸 환상 세계가 바로 '산경'인데, 하지만 산경은 쉽게 묘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쉽게 묘사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환상에 그쳐버리고 말 것인데, "경 없이 가는 길, 그것이 문자의 운명"(<산경을 비추어 말하다>에서)이기 때문이다. 문자는 원래 환상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문자라면. 하지만 하나의 협약된 기호로서가 아니라 우연이 만들어진 기호로서 문자, 징조로서의 문자가 있다. 옛 사람들은 거북이 등을 구워 거기에 갈라진 선의 모양을 징조로 삼아 미래를 예측하지 않았던가. 송찬호는 시인을 바로 거북이 같다고 본다. "자신의 등을 구워/문자를 만드는 사람,/우리 동네 시인/같은 사람"은 "세상에는 등에 거울을 지고/ 다니는 사람"(같은 시에서)이다. 거북이 등에 불을 지피고 미래를 보여주는 이가 바로 시인이며, 거북이 등은 바로 미래를 비추어주는 매개체, 거울이다. 송찬호는 "그런 거울 백 개를/모을 수 있다면/산경을 두루 비출 수 있다 했단다"라고 말한다. 거북이 판 하나, 거울 하나는 바로 시 한편을 말할 것이다. 그 시는 어떻게 이루어질지 시인 자신도 알 수 없다. 시인은 자신의 등을 굽고 무엇이 될 지 모를 갈라진 선들, 우연의 문자들을 만들고 미래의 세계를 암시할 뿐이다. 산경을 찾는 사람들은 <촛불>의 시인처럼 어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무엇인가 열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세상의 절경 한 폭 짊어지지 못하고 春窮을 넘어가는 저 비탈의 노래가 저러다 정말 산경의 진수를 찾아 들어가는 거 아닌가/살 만한 땅을 찾아 저렇게 말뚝에 매인 집 한 채 뿌리째 떠가고 있으니/검은 아궁일 끌어 묻고 살 만한 땅을 찾아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저 신선 가족이 가고 있으니"(<봄날을 가는 山經>)라고 시인이 쓰고 있듯이 '살 만한 땅을 찾'는다는 열망을 안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사람들, 그들은 시의 세계에선 살만한 땅인 '산'을 만나 '산경의 진수'를 찾아들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들이 산경의 진수가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초가 되어버린 '나'처럼. (그런데 시인은 이들 떠가는 가족 무리들을 '느릿느릿 저 신선 가족'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표현은 여유롭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견디어 내는 그 답답할 정도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우직함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산경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가? 중국 신화 전설 집인 산해경의 환상 세계일텐데, 시인은 산해경 세계의 무엇을 주목하는 것일까? 산경의 세계는 결코 뚜렷하게 드러낼 수 없는 세계이다. 이 세상의 세계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구운 거북 등판의 무늬처럼 추상적으로 암시할 수 있을 뿐 선명히 드러낼 순 없는 세계일 듯 하다. 시인의 문자는 이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세계를 좀 더 선명히 드러내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리라. 시인은 이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새로운 상징을 창출한다. 그것이 동백인바, 산경은 바로 이 동백이 있는 곳으로서 암시될 뿐 뚜렷이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동백마저도 그 의미를 완전히 드러낼 수 없다. 동백을 붙잡아 그릴 수 있는 때는 바로 다음 순간이다.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꽃을 활짝 피웠다./허공으로의 네 발/허공에서의 붉은 갈기//나는 어서 문장을 완성해야만 한다/바람이 저 동백꽃을 메어물고/땅으로 뛰어내리기 전

[인상깊은구절]
이제 나는 돌부처의 목 부러진 이유를 알겠다 부러져 뒹굴며 발끝에 채이는 미소의 이유를 알겠다 내 안에서 서로 싸우는 짐승들 또한 그렇다 그래, 너희들, 그렇게 싸우는 분명한 선악의 경계가 있는 것이냐 인면과 수심 중 분명한 승자가 있는 것이냐 오늘은 아예 인면이나 수심의 어느 한쪽 얼굴이 아닌 두루뭉수리 인면수심의 얼굴로 돌아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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