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네시, 미궁의 이름이자 그곳에 사는 유일한 사람인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여기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방이 있다. 방은 미로처럼 복도와 계단으로 얼기설기 복잡하게 연결되고 벽에는 저마다 다른 모습의 생동감 넘치는 조각상들이 즐비하다. 어떤 방은 웅장한 계단이 달린 현관으로 시작하고 어떤 방은 천장과 바닥, 심지어 벽마저 무너져 어둑어둑해 보인다. 집 바깥은 해, 달, 별이 존재하고 집 안쪽은 해수가 거대한 굉음을 내며 바닥과 벽을 치기도 한다. 주인공이 살고 있는 중간 층을 기준으로 그 아래층은 바다가 있고, 그 위쪽으로는 구름이 있다. 피라네시가 미궁을 탐험하면서 촘촘하게 기록하고 묘사한 일지들을 천천히 따라가다보면 거대한 미궁 속에 길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온 몸으로 감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여실히 와 닿는다.
나는 각 조각상의 위치, 크기, 주제 및 기타 관심 항목을 기록하려고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남서쪽 첫째와 둘째 홀을 완료했고 지금은 셋째 홀의 목록을 적고 있다. 워낙 방대한 작업이어서 때로는 좀 아찔해지지만 과학자이자 탐험자로서 나는 세상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목격할 의무가 있다.
<피라네시> p.21
주인공 '나'는 미궁을 탐험하고 기록하는 첫 번째 사람이다. 이어 등장하는 '나머지 사람'은 주인공과 함께 미궁을 연구하는 두 번째 사람이다. '나머지 사람'은 위대하고 은밀한 지식이 미궁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어느 날 나머지 사람이 피라네시에게 "배터시"를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그날 피라네시는 이상한 이미지를 감각한다. 잿빛 하늘에 검정색으로 휘갈겨 쓴 듯한 글자와 새빨간 뭔가가 깜빡이는 장면이 보였고 요란한 소음과 금속성 맛이 혀에 느껴졌다. 감각들을 붙잡으려는 순간 그것들은 꿈처럼 희미해지다가 사라져버렸다. 피라네시는 과연 누구인가, 자신의 이름인 피라네시를 감각할 때마다 느껴지는 이질감은 또 어떤 이유인지, 소설은 하나씩 밝혀낸다. 그러다 '16'이라는 미지의 사람이 미궁에 나타나고 '나머지 사람'은 피라네시에게 그를 멀리 하라고 경고한다.
모두들 진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서 무엇이든 새것이면 옛것에 비해 우월한 것이 틀림없다고 여긴 게야. 마치 가치라는 것이 연대순으로 생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네! 하지만 나는 고대의 지혜가 그냥 사라졌을 리가 없다고 느꼈네. 그냥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그런 일은 사실 불가능해. 나는 그것이 에너지가 세상에서 빠져나가는 일과 비슷하다고 상상했고, 그렇다면 이 에너지가 어딘가로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네. 바로 그때 다른 장소들, 다른 세상들이 분명히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지. 그러해서 나는 그곳들을 찾기로 했네.
<피라네시> p.130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미궁에 나타났다. 피라네시는 그를 예언자라고 불렀다. 그는 과거에 존재했던 '고대의 지혜'들이 세계의 틈을 통해 어딘가 다른 세계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라고, 그 지류 세상이 바로 피라네시, 미궁이라고 했다. 그리곤 '16'이 올수록 위험해지는 것은 피라네시가 아닌 '나머지 사람'이라고 예언을 하고 떠난다. 예언자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6'이 미궁을 다시 찾아왔다. '16'은 미궁 안에 있는 둑을 막기 위해 쌓아둔 조약돌로 글자를 만들어 피라네시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그 글자들을 읽는 순간 피라네시에게 어떤 이미지가 기억이나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작성했다는 것도 잊고 있었던 일지들을 찾아 하나씩 비밀을 깨쳐간다. 미궁이 가진 비밀은 무엇인지, '나머지 사람'과 '16' 중 진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작가는 소설의 몇 십 페이지를 할애해 웅장한 미궁을 설명한다. 독자의 인내심이 살짝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인내가 무한히 가치롭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작가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도화지 위에 아주 조금씩, 섬세하고도 촘촘하게 스케치를 시작한다. 선과 면들이 모여 완벽하리만큼 아름다운 미궁을, 문장만으로도 나를 압도하는 환상적인 그 공간을 완성하고 나면 이내 엄청난 반전이 시작된다.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와 아름다운 문장의 <피라네시>, 이 속에 담긴 아름다움, 엄청난 반전 그리고 이것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려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