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소설이다. 고전 걸작으로 이름이 높아서 독서에 일천한 나도 어릴 적부터 제목은 알고 있었다. 제목만 알았지 읽어볼 생각은커녕 내용을 찾아볼 관심도 갖지 않은 채로 지금까지 시간을 보냈고 구매한지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경험하게 됐다.
한참이나 고기를 잡지 못한 노인 어부 산티아고가 평소 함께하던 소년 마놀린 없이 혼자서 먼 바다까지 나가서 겪는 이야기.
산티아고는 자기 배보다도 큰 청새치를 마주하고, 끌고 끌리며 밤을 새는 혈투를 지속한다. 배는 항구에서 점점 멀어진다. 노인도 청새치도 지치지만 둘 다 서로에게 굴하지 않고, 이후 노인에게는 위기의 상황이 몇 차례 찾아온다. 꽤 극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서술하면 처음 읽는 독자의 감흥을 방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찾아온 위기를 대처하는 산티아고를 보며 그가 삶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느낄 수 있다. 생태계 어디서나 존재하는 먹이사슬의 순환은 84일이나 고기를 잡지 못했던 외로운 어부의 일이더라도 예외가 없다. 바다 역시 대자연의 일환으로 땅이나 하늘이 그렇듯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에 아낌없이 베풀고 가장 감사할 선물을 주는 동시에 비할 데 없이 무자비하다. 산티아고가 시간을 보내고, 고기를 낚고, 살아가던 멕시코 만류도 마찬가지다.
그는 늙었다. 자신이 더 이상 젊을 때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산티아고는 깊게 사유하는 인물이 아니라 느끼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사흘 밤낮을 새며 포기하지 않고 헤쳐나간 여정이 삶의 가치를 긍정한다. 그의 항해는 시작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지 않았다. 우리가 볼 때는 무모할 정도로 모험적이지만 노인 스스로는 무리해서 좀 멀리 나왔다고, 그래서 모든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여정은 우연히 행운이 찾아와도 그걸 행운이라고 확신하기 힘들고, 행운임을 알더라도 확보하기 힘들다. 그러나 노인은 불굴의 의지로 행운을 잡아냈다. 뒤이어 줄짓고 몰려오는 위기, 덴투소와 갈라노들은 악운이 아니다. 행운을 잡아내려 악착같이 노력한 끝에 따라붙은 결과다. 사투 끝에 흘러나온 피에선 짙은 냄새가 나고, 바닷물을 적시고 물들이며, 바다에 사는 포식자와 청소부들을 깨운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노인은 위기에서 타인과의 유대에 대한 가치를 절실히 깨닫는다. 물론 노인은 바다로 나갔을 때부터 소년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건 여정이 끝났을 때처럼 심화된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 접한 헤밍웨이의 작품이지만,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그의 문체가 왜 미국문학의 유산이라고 불리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 명료하고 짧은, 객관적 사실만을 나열하는 문장에 담겨 있는 것들. 그 문장이 주제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어떤 향신료도 없이 무미건조한 산문이었지만 세밀한 감성을 건드렸고 서사 자체의 환상적 분위기와 맞물려 내가 본 어떤 글보다 시적이었다.
줄곧 산티아고의 심리와 내면을 묘사하고 그를 통해 이야기의 배경을 비추지만 그 모든 표현은 언제나 간결하다. 난잡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어떤 길고 수사적인 글보다도 인물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해설에서 실존주의자들과 헤밍웨이의 공통점에 대해 다룬 내용이 있었다. 이들의 철학에 대해서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문학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종합적으로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집중력이 부족해 어릴 때를 제외하면 독서 경험이 거의 없는데다 그마저도 끝까지 읽은 책이 손에 꼽는데, <노인과 바다>는 분량도 길지 않고 우수한 해설이 뒷받침되어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퓰리처상 수상작답게 무수한 해석의 가능성과 삶의 사유, 철학적 요소를 담고 있을지 모르지만, 제쳐놓고도 직관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평범한 일반인의 고전 독서 경험으로써 훌륭한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 디자인이나 만듦새도 마음에 든다. 대화문이 낫표로 표기된 넘버링 타이틀은 너무 옛날 책 같아서 별로인데 <노인과 바다>는 큰따옴표로 표기되어 있어서 좋았다. 이렇게 짧은 소설에는 어울리는 판형인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