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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eBook]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저/홍은주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주의깊게 읽었다. 나에게 무슨 중요한 깨달음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러나 아무것도 깨달을 수 없었다. 난해한 이야기에 힌트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무음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을 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필요한 건 내 정신이 이야기를 따라가며 배회할 만한 시간이였다.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보고.

 

"나는 그런 불꽃의 모습을 주의깊게 관찰했다. 나에게 무슨 중요한 가르침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무음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을 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필요한 건 적절한 시간의 경과였다."

 

책을 읽으면서는 '아 이건 XX에 대한 이야기일까?' 했다가 '그게 아니라 YY에 대한 이야기일까?'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아 이거였구나' 하고 얘기할 수 없어 찜찜했다. 도시는 무엇이고 벽은 무엇인지. 도시 안에 있는 것이 그림자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것은 그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불확실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소설은 우리와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 경계가 확실한 것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불확실한 너무 많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의식과 무의식의 그 불확실한 경계

실재와 투사의 그 불확실한 경계

현실과 상상의 그 불확실한 경계

망상과 상상의 그 불확실한 경계

중독과 헌신의 그 불확실한 경계

기억과 왜곡의 그 불확실한 경계

현실과 사실의 그 불확실한 경계

가치관과 아집의 그 불확실한 경계

의지와 욕심의 그 불확실한 경계

정의와 불의의 그 불확실한 경계

...

...

...

 

그러니 이 소설에서 말하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재미있게 푹 빠져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매일매일 조금씩 변하는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느끼며 산책을 하고 돌아온 것 같았다. 책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은 내 정신이 이리저리 배회할 수 있었던 의미있는 산책의 시간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불확실한 어둠이 이제 두렵지 않다. 어둠은 무엇보다 깊고 어디까지나 부드럽게 나를 감싸줄 뿐이다. 그 깊은 어둠에는 나를 살아가게 할 힘이 있다. 불확실한 이야기 끝의 참 아름다운 결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이자 나아감에 대한 이야기다. 나에게 소중한 비밀을 품은 그 도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수많은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야스 씨도, 옐로 서브마린 소년도 모두 나다. 도시에 있는 본체도 (혹은 그림자도), 도시 바깥에 있는 그림자도 (혹은 본체도) 다 나다.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나아가는 나.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나. 허상을 쫓아 현실에서 도피하는 나. 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 스스로를 공포 안에 가두는 나. 현실을 살아가는 나. 매일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들고, 헬스장에 가서 건강을 챙기고, 일상을 청결히 유지하고, 남은 시간에는 책을 읽으며 현실의 규칙성을 유지하는 나.

 

어떤 하나의 내가 아니라 수많은 다양한 마음을 가진 내가 여러 현실을 동시에 살아가고 있다.

 

누구에게나 상실이 있다. 한때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든, 간절히 원했던 부모님의 사랑이든, 정말 행복했던 어떤 순간이든, 얻고자 노력하지만 얻어지지 않는 그 무언가이든. 실재로 있다가 불합리하게 없어졌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사라졌든, 원래부터 내가 가질 수 없던 것이었든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의 부재는 슬픔을 가져온다.

 

그럴 때 우리는 나만의 도시를 만든다. 나만의 이상향. 나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내가 가치있는 곳,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 내가 행복한 그곳, 내가 생각하기에 완벽한 그곳. 오롯이 내 생각만으로 만들어져 존재하는 그곳.

 

상실로 인해 만들어진 도시는 나의 삶과 기억에 따라 생명체처럼 변화한다. <기억의 뇌과학>에 나온 것처럼, 우리 뇌는 기억에 왜곡을 더해 새로 만들어진 기억으로 덮는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고 싶은 방향으로. 나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그럴 수도 있던 것에서 진짜 그랬던 것으로, 다시 엄청나게 그랬던 것으로. 기억과 왜곡과 욕망과 슬픔이 얽히고 얽히며 나는 나만의 사고 체계라는 도시에 갇힌다.

 

나는 나만의 상상력으로 만든 도시에 숨어 현실의 누군가를 탓하거나 현실의 어떤 상황을 탓할 수 있다. 누군가나 현실이 밉거나 원망스러운 것도, 다시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것 까지도 나의 도시의 영향을 받는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를 살라는 말은 부질없다. 과거와 현재와 그 도시와 나의 경계는 애초에 불확실하니까.

 

그러나 나는 도시에서 안심하는 나를, 도시에 안주하는 나를 도시 밖으로 꺼내줄 수 있다. 나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 무의식에서 현실의 나에게 자신의 힘을 보태는 내면아이도, 내가 힘을 낼 수 있게 따뜻한 조언을 건네는 어른도 나이기 때문이다. 어디 쉽겠냐만은, 나의 용감한 낙하를 나 자신이 안전하게 받아줄 거라고, 진심으로 믿으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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