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 후반에 염세주의의 수렁에 빠졌다. 수능 준비로 공부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왜 사나'하는 물음의 끝은 공허감이었다. 겨우 십 몇 년 살아온 삶이 지난했고, 남은 삶은 더 지난할 것 같았다. 권태와 염세만 남아 있다 생각한 삶에서 나의 선택은 죽음이 아닌 생이었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서 생을 선택한 건 아니었다. 죽음의 순간에 맞닥뜨린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커서 실행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렇게 맞이한 20대는 삶의 의미를 찾을 여유조차없이 지나가 버렸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면 깊이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따윈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30대의 끝자락에 선 지금은 그저, 그냥 살아간다.
이 책은 제목에 꽂혔다. 염세주의로 삶을 낭비했던 청소년기가 떠올라서다. 내가 찾고자 하는 답이 책의 제목이라니 읽어야만 했다. 강렬한 빨간 표지에 철학서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 단숨에 읽혀서 믿을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뭔 소리야'를 연발하게 만드는 다른 철학서와는 결이 다르다.
19세기 인물인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이며 교수였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인물이기도 하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실용주의 철학을 확립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이 타 철학서에 비해 가독성이 매우 좋은 이유가 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강연했던 내용이고, 옮긴이의 세심함으로 명료하게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10대에는 교회, 20대는 절(별의별 소수 종교체험 포함), 30대는 성당에 다니며 종교에 심취한 바, 늘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선과 악에 있어서 신의 존재 여부다. 선의 상태는 영속적일 수 없고 인류의 진보와 함께 선도 같이 진보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이 선으로서 가치를 드러내는 건 악에 의해 위협 당하거나 처참히 무너졌을 때다. 그렇기에 모두가 성자일 수 없으며 누군가는 죄인이 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 학파의 주장에도 도덕적 진보의 개념은 환상이라 한다. 그악한 악이 사라지면 더욱 교묘하고 해악한 악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고 주장하면서. 악을 저지른 죄인에게 신은 회개하라 하고, 죄인이 회개하고 신이 용서하면 모든 죄는 깨끗히 사라지는 걸까. 악을 미리 막을 수는 없고 회개와 최후의 심판만이 있을 뿐인가. 선과 악에 있어서 신의 역할은 무엇일까하는 고민만 깊어졌다.
삶이 두려웠다. 삶은 여전히 길고 지난하고 잔인하게 다가온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아 컴컴한 터널을 지나는 기분을 수시로 들게 한다. 하지만 삶의 마지막을 자살로 완성하고 싶진 않다. 견뎌내며 살아가다보면 내 삶의 가치도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삶이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나, 그 가치를 찾았나, 묻는다면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삶에는 미리 예정된 것도 정해진 것도 없다. "모든 가능성들은 지금 여기 당신에게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