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속에서 실용적으로 기능하는 대개의 명조체는 점심 때 쓴 여느 숟가락의 숙명을 가졌다. 하지만 어디 폰트뿐일까? 사회에는 각고의 노력을 들여야 겨우 아무 일 없는 듯 보이는 영역이 도처에 있다. 그 묵묵한 작동을 멈추면 문제가 생기고 탈이 난다. 한글 명조체는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 드러날 듯 말 듯 스며서 작동한다.' -본문 중 발췌
교회에서 방송실 봉사를 하며 드는 생각이 있다. 소리가 잘 나오나, 조명은 괜찮은가, 카메라 구도는 어떤가. 예배 내내 매끄러운 진행을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다. 탈없이 예배가 끝나면 그 날은 성공적인 날. 누구도 칭찬하거나 알아봐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방송실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방송사고가 났을 때. 소리가 안 나오거나, 조명이 꺼지거나, 카메라가 흔들릴 때이다. 아, 잘해봐야 티 안나고 잘 못해야 티가 나는 운명이로구나. 본문 중 필자가 명조체의 숙명을 숟가락에 비유한 것이 깊이 와닿았다. 지난 점심에 먹은 숟가락의 모양이 기억나지 않는 것은 먹기 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숟가락의 모양이 기억난다는 건 불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아야 성공한 것이다. 먹기 편한 숟가락을 위해, 읽기 편한 명조체를 위해, 예배하기 편한 방송환경을 위해 자기를 지워야만 한다. 이 얼마나 겸손한 모습인가. 하지만 우리는 그 편함을 만들기 위해 뒤에서 고군분투한 '디자이너'들을 기억해야한다. 그리고 감사해야한다.
'얼었다 녹아
붓으로 전부 길어 올리는
맑은 물
-바쇼
얼었다 녹아 붓으로 전부 길어 올리는 맑은 물. 시인 바쇼는 왜 그 물을 붓으로 길어 올리고 싶었을까? 사람의 마음이야 헤아리기 어렵지만, 이후 붓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대개의 붓은 한 번에 약 10밀리리터 정도의 먹물을 머금는다. 먹물은 탄소와 아교와 물의 혼합물이다. 색을 내는 탄소 입자가 종이에 자국을 남기고 물은 증발한다. 그러나 눈이 녹은 맑은 물은 색을 내는 입자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 붓은 종이에 흔적을 남기는 대신, 마른천에 물기가 닦이고 말려졌을 것이다. 얼음이 녹은 물은 붓털에서 그대로 증발했을 터다. 이렇게 보니 이제 시인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그는 붓을 겨울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는 지우개로 썼다. 붓으로 다 길어 올려질 정도로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을 그대로 두지 못할 만큼, 그는 봄이 기뻤던가 보다.' -본문 중 발췌
기다리던 봄이 찾아왔다. 그 기쁨을 이토록 차분하고도 활기차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눈 녹은 물을 먹물 삼아 붓을 흠뻑 적시면 보송해진 봄이 눈 앞에 다가와있다.
'월인천강(하나의 달이 수천개의 강에 새겨지다), 이 네 글자는 내게 인쇄술과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로 읽힌다. 달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생각이다. 그 생각을 강물이라는 종이에 찍고 스크린에 실어 여러 사람에게 전한다. 이것이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이고, 글을 더 정련해서 전하고자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또 타이포그래피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사람들이 책과 신문과 잡지를 만들고 인터넷을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림과 글자는 한 몸에서 분화했다. 한 폭의 그림 같고 한 수의 시 같은 글자들이 강물에 달 찍히듯 사람의 마음에 찍힌다. 자국으로 남겨지고, 그리움으로 그려지고, 기억으로 새겨지고,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살아남아 생명처럼 생생한 심상과 이야기를 이어 간다.' -본문 중 발췌
인쇄술과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필자의 감상이 인상적이다. 이래서 언어를 생명체라고 하나 싶다. 남겨지고 전해지고 또 변해가며 살아남는 언어. 그리고 글자. 이 책은 하루에도 몇십번, 몇백번씩 스쳐지나가는 글자들을 잠시 멈춰서서 다시 보게 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그 글자 뒤에 있는 타이포그래퍼는 어떤 사람일까 가볍게 상상해보는 재미도 더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