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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http://m.ch.yes24.com/Article/View/54140

올해로 11년째 12~2시를 책임지는 <정오의 희망곡> DJ 김신영을 만났다. 팔이 불편해 보이길래 물으니 이제 막 <전국노래자랑>에서 유도 시연을 하다가 다친 어깨의 깁스를 풀었다고 했다. 걱정 어린 눈길에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이 돌아온다. 말로 천하를 호령하는 기세보단 얇은 막 같은 긴장이 서린 첫인상이었다. 그는 "낯을 가린다"고 했다.

'낯'은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민낯' 같았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 할머니와 아버지 곁을 오가며 이사만 60번을 다니고, 때로는 비닐하우스에서 지내며 혼자 키웠을 외로움의 감정. 생의 고단함을 일찍 겪을수록 빨리 찾아오는 게 사람과의 거리 두기, 즉 '낯'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그는 그 영겁의 경험을 동력 삼아 일등 코미디언이, MC가, DJ가 또 때로는 연기자가 됐다. 그는 자신을 "결핍에서 시작한 사람"이라고 했다. 결핍. "행님아!"를 외치던 152cm의 22살 청년이 "전국"을 외치는 41살이 됐다.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악착같이 음악과 웃음 곁을 좇은 김신영. 그와의 대화를 시작해본다.



요새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

<전국노래자랑>이 농사와 비슷하다. 엄청 더울 때는 안 하고, 엄청 추울 때는 또 안 나간다. 날씨가 좋은 날 한 번에 몰아서 (촬영을) 하는데, 4월에 녹화가 9개 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꽃피고 날씨 좋고 할 때. 4~6월까지 바쁘다.

<전국노래자랑>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나. 방송에 적응은 좀 됐나?

이제 거의 6개월쯤 됐다. 적응이라기보단 여전히 배우는 단계다. <전국노래자랑> 자체가 1980년대에 시작된 프로그램이고 송해 선생님이 30년 진행하셨는데, 6개월이면 오프닝 수준 아닌가. (웃음) 아직 워밍업 단계다.

또, 보통 방송 가면 진행 큐 카드나 프롬프트가 있다. 그런데 <전국노래자랑>은 그게 없다. 아예 없다. 생라이브. 전날 4시나 늦으면 8시에, 19페이지 분량의 대본이 나온다. 처음에는 부담이 많이 됐다. 그래서 필사를 했다. 대본을 깜지쓰듯 다 적어가며 새벽까지 외운다. 소설책처럼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리허설에 참여하고 있다.

사실상 올인을 해야 하는 건데.

그렇다. 그래도 행복하다. 하길 정말 잘했다.

왜 김신영이 <전국노래자랑>의 새 MC가 된 것 같나?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어렸을 때 이사도 60번 넘게 다녔다. 그 덕에 여러 고장의 사투리를 잘 안다. 또,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정오의 희망곡(이하 '정희')>만 11년째다. 성실함. 라디오는 매일 움직여야 한다. <전국노래자랑>도 성실하지 않으면 힘들다. 그런 면을 높게 봐준 것 같다.

인상과는 달리 낯을 가리는 편이라고. 진행할 때 어려운 점이 있을 것도 같은데.

성격이 낯을 가린다고 일은 안 하는 건 아니다. 각자마다 성향과 성격이 다 있다. 하지만 일을 하는 사람인데 내 성격대로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프로'이지 않나. 내성적인 성격은 라디오나 팬 미팅 같은 거 보면서 많이 나아졌다. 보통 여성 코미디언들이 지역 축제 사회를 잘 안 보는 편인데, 나는 레크레이션 자격증을 따고 행사도 많이 다녔다. '10년은 무조건 배우는 시기다' 했다. 

더불어 <전국노래자랑> 같은 경우에는 내가 주인공이 아니다. 참가자들이 주인공이다. 나는 그들이 최대한 스트레스 안 받고 긴장 안 하게 도와주는 역할일 뿐이다. 현장 가면 내가 그런 말을 한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내려가시라고. 여러분이 주인공이라고. 다 받아들이겠다고.

올해로 방송 11년 차에 접어든 <정희> 또한 김신영의 큰 궤적이다.

내게 <정희>는 삶이다. <정희>에는 정선희 선배가 DJ 했을 때 게스트로 처음 출연했다. 내가 난독증이 좀 있다. 코미디는 3분 힘써서 하고 나가면 끝인데, 라디오는 말에 귀 기울이니까 처음에 너무 힘들었다. 정선희 선배가 "신영아, 넌 잘할 수 있어. 넌 재주 있는 애야. 포기하지 마. 넌 게스트도 할 수 있고 DJ도 할 수 있어" 하면서 계속 다독여줬다. "00시에 사는 A씨 사연입니다"를 못했다. 순간 겁먹으면 글이 다 날아다녔으니.

<정희>가 한 달간의 시간을 준 유일한 매체였다. 그 시간 동안 읽고 말하는 걸 계속 연습했다. 그러면서 자신감이 붙고 다른 데 9개 고정 게스트를 했다. 슬슬 소문이 돌면서 <심심타파> DJ가 됐다. 내가 생각보다 참 많이 돌아서 온 아이다. 낯을 가리니까. 예능도 4년 동안 통편집됐었고.

음악을 좋아하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음악은 언제부터 좋아했던 건가?

나는 때로는 할머니 손에 또 때로는 아빠 손에 컸다. 두 분이 음악을 좋아했다. 할머니들은 또 음률을 넣으면서 말을 하지 않나. 

"머얼 먹으면 자알 먹었다고 소문이 나알까나~"

사실 이게 음악이다.(웃음) 할머니가 김상국의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 같은 옛날 노래도 많이 불러줬다. 아버지는 포크송을 좋아했다. (몇 년생이냐고 물으니) 1955년생. 당시 그룹사운드 음악들, 밴드 이글스, 김광석이나 김현식, 송골매 이전 활주로 시절 노래들. 또, 대학가요제 음악도 많이 들었고.

마그마의 '해야'도 좋아한다. 보컬이 조하문씨인데. '해야'가 가사를 또 시에서 가져온 거다. 옛 표현들이 참 아름답다. 가사가 수필, 시 이런 느낌이다. 쌓다가 부수고 느낌도 있고. 유상록 '해운대 연가'의 한 구절인 '푸른 물결 춤을 추고, 물새 날아드는 해운대의 밤은 (...) 솔밭길 걷던 우리들의 사랑 얘기가 파도에 밀려 사라지네'에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10~20대가 그려진다. 그런 걸 담아낸 음악들이 좋다.

라디오 DJ로서 옛 음악을 많이 아는 건 확실한 강점이다.

그래서 난 우리 방송에서 임병수의 '아이스크림 사랑'을 엄청 많이 틀었다. DJ는 디스크자키니까.

자라면서 할머니나 아버지의 음악적 영향을 놓치지 않고 받은 것도 한몫한 것 같다.

가난해서 그랬다. 학원에 다니지도 않았고... 음악은 내 '힘듦'을 달래 줬고, 꿈을 꾸고 키우게 해줬고, 또 어떨 때는 같이 울어주던 존재다.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럴 땐 노동요가 짱이다. 음악은 위로인 것 같다. 양희은 선생님이 그러더라. 결핍이 많은 애들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코미디언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여러 부류의 코미디언이 있겠지만 어렸을 때 웃을 일이 없거나 내가 웃는 거를 못 보면 다른 곳에 가서 그 웃는 걸 찾고 싶어진다. 그게 사실 결핍인데. 나는 그 결핍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활동에) 충족이 많이 된다. 충전되는 느낌이고.



데뷔 20년 차 김신영 엔터테인먼트 역사에 있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예원예술대학교 코미디 연기학과에 붙었을 때. 코미디 관련된 대학이 대한민국에 딱 거기 하나밖에 없다. 전유성 교수님이 있었는데, 시험 문제 4번이 아직도 기억난다. 혜화역 4번 출구에서 애국가 부르기. 얼마나 창피했는지... 내가 이 과를 왜 들어와서...(웃음) 또 '이게 뭐야' 했던 건 지하철에서 물건 팔기. '부딪혀 보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두 번째는 대학교 축제 때 연극했던 것. 그때 했던 연극이 01학번 선배가 만든 <신데렐라 콤플렉스>이다. 여기서 참 많은 걸 배웠다. 나에 대한 확신. 내가 무대 위에서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행님아(김신영이 했던 대표 개그 코너)'도 할 수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행복은 벚꽃 같다. 벚꽃이 피길 기다리다가 막상 피면 감흥이 없다. 근데 지면 또 그때부터 그리워한다. 기다리는 거다. 행복은 지나 봐야 아는 거지. 돌아봤을 때. 내가 살아 있다고 느꼈던 건 작년 말 <전국노래자랑> 연말 결산 때였다. MC 시작하고 2개월쯤 됐을 때 '설 특집 1020'을 하게 됐다. 내가 다른 건 웬만해서 다 해봤다. 그런데 이거는... 연말 결산 끝나고 나니까 땀이 쫙 나더라. '오랜만에 땀 뺐다. 이걸 혼자 해냈다' 싶었다. 막걸리를 한잔 딱 마셨는데 뜨거운 기운이 다리까지 퍼지는 느낌에 막 희열이 들었다.


그는 스스로를 눈물도 없고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했다. 겉이 두껍다고 하여, 속까지 딱딱하지는 않다. 유난히 고달팠던 어린 시절을 달래준 '행복의 나라로'를 <전국노래자랑> 첫 방송에서 양희은과 부를 때, 감춰뒀던 그간의 상처, 외로움, 기쁨, 희열이 한 데 뭉쳐져 울상이 되고, 무대에 오른 한 퇴직 광부의 무덤덤한 사랑 고백에 울컥하는 사람. 그에게서는 느껴본 자만이 맡을 수 있는 인간의 냄새가 났다.

텔레마케터, 신문, 음료 배달 등 안 해본 일 없이 열심히 산 그에게 '입담'은 가난이자 결핍이고, 상처이자 선물이었다. 라디오에서 돈도 못 받고, 도리어 잔뜩 욕만 먹은 청취자의 일화가 전파를 탈 때 엉엉 울 틈을 내주는 사람. 그리곤 다음 날 다시 그 벨을 누르라고 용기와 힘을 주는 사람. 눈물이 쓰고 짠 것을 아는 자만이 지닌 넉넉한 유쾌함이 그의 단어 하나하나에서 새어 나왔다.


반대로 너무 힘들었던 때가 있다면.

괴로운 건 뭐 눈 뜨면 괴롭다. 내 멋대로 사는 인생이 어디 있겠나. 그래도 가장 괴로우면서 나한테 득이 됐던 건 2012년 공황 장애가 터졌을 때. 하늘 높을 줄 모르고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구나를 느꼈던 김신영에게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12월부터 3개월을 꼬박 쉬었다. 엘리베이터도 못 타고 집에서도 계속 발작하고.

그때 전유성 교수님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 "축하한다. 너는 득도를 할 꺼야. 너에 대해서 진짜 공부를 이제부터 시작하는 거지" 그래서 내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지금 죽을 것 같다. 밥을 먹어도 갑자기 갑자기 그러니까…" 했더니, "그러니까! 인생이 갑자기 갑자기인데 너가 계속 갑자기 발작이 오는 건 네가 너를 너무 몰라서 그래. 앞만 보지 마. 일단 너를 보고 나서 앞을 봐야지. 낭떠러지가 있는데 앞만 보고 걸어봐라. 너 죽는 거야. 축하한다" 그러는데 기분이 팍 상했다. (웃음)

내가 남에 대해서 공감 능력이 부족했다. 예능 나가서 한 세 번 크게 웃기고 "그래 김신영이다"라는 얘기 듣고 살아야지 욕심냈다면, 공황 장애가 딱 터지고 나서 바로 고꾸라졌다. 방송도 못 하고 2~3년은 힘들었지.

그런데?

그런데. <정희>에서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사실 다른 방송에서는 다 잘렸다. 예능이 얼마나 빨리 돌아가는 곳인데 그거를 기다려주나. 그런데 또 KBS 심미진 PD한테 연락이 왔다. <인간의 조건 여자편>을 할 건데 내가 하면 하고, 내가 안 하면 안 한다고. 언제쯤 낫느냐고. 6개월 정도 인지 행동 치료 같은 거 필요하다고 하니까 기다리겠다고 했다. 방송국에서 기다려준다는 건 없는 일이지 않나. 그런데 참 많은 분이 기다려줬고, 그래서 더 감사하다. 책임감이 많이 든다.

사람들이 내 목소리 하나에 즐겁고 웃고, 사연도 보내고 한다. 또, <전국노래자랑>가서 "여러분 손 머리 위로" 하면 모두가 다 손을 머리 위로 든다. 이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지금 오른팔을 다쳤는데, 무대에 있으면 아픈 게 없다. 이번에 영도에 가서 내가 그랬다. 지금 박수를 너무 치고 싶은데, 왼팔밖에 없으니 여러분들이 내 오른팔이 돼 달라고. 박수 많이 쳐달라고. 그러고 나서 "전국" 했을 때 돌아오는 "노래자랑" 소리. 소름 돋고 행복하다. 사람들이 웃는 순간순간이 다 나한테는 행복이고 기쁨이다.


*김신영이 꼽은 나에게 울림을 준 노래 BEST 5

1. 엘튼 존 'Crocodile Rock'

공황 장애가 터지고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때 엘튼 존이 엘리자베스 2세 즉위 60주년 콘서트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봤다.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나더라. 부러운 게 아니고, 내가 평생 이런 무대를 해봐야지 싶었다.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그때 기억과 그 울림이 아직도 여기 남아 있다.

2. 양희은 '행복의 나라로'

원래는 한대수 선생님의 곡인데, 나는 양희은 선생님이 부른 버전을 더 많이 들었다. 고등학생 때 금니를 했는데 그때 치과 가는 게 그렇게 무섭더라. 다 큰 손주가 무섭다고 하니까 외할머니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줬다. 같이 가서 앉아있는데 라디오에서 이 곡이 나왔다. 할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아주면서 귀에 대고 이 노래를 불러줬다.

3. 김현식 '추억 만들기'

모르겠다. 그냥 이 노래가 너무 좋다. 울고 싶을 때는 이 노래를 많이 틀고 울었다.

4. 서태지와 아이들 '난 알아요'

우리나라 음악의 판도를 바꿔놨다. 동시에 내 음악 취향도 많이 바꿔 놨고. 어릴 때 오빠랑 둘이 엄청나게 연습하고 그랬다.

5. 셀럽파이브 '셀럽이 되고 싶어'

일본 여고생 댄스팀 TDC의 영상을 한 만 번쯤 보고 무턱대고 일본으로 갔다. 우여곡절 끝에 아카네 코치를 만나서 허락받았다. 바로 송은이 선배한테 전화해서 "허락 맡은 게 있는데, 정말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프로젝트다.
고등학교 때 내가 중늙이었다면, 이때의 내가 진짜 고등학생 같다. 35살 전까지는 그냥 나 이렇게 예능 하다가 죽을 사람인가보다 생각했지, 이렇게 머리 속에 있는 걸 기획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단체복 원단 고르는 것부터 개사까지 다 직접 했다. 셀럽 파이브 활동을 통해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구나 느꼈다. 이게 되는구나. 내 자신감을 높여줬던 시기라 내게는 굉장히 뜻깊은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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