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귓가에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Evening is the time of day I find nothing much to say......
노래 제목은 클리프 리차드의 "early is the morning".
제겐 오래 전 본 임창정, 고소영 주연의 영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ost로 기억이 나지만, 정유정 작가가 이 노래를 들으며 <진이, 지니>를 썼다고 하기에 유튜브에서 찾아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왠지 정유정 작가가 이 소설을 쓸 때의 느낌을 공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그동안 제가 읽은 독서 목록 중 가장 강렬하게 몰입하며 읽은 소설이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입니다. 책을 읽고 한동안 세령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였으니깐요. 7년의 밤 이후 출간 한 <28년>, <종의 기원>을 통해 악의 3부작을 완성하였기에 지난 5월 정유정 작가가 새로운 소설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대를 하며 책을 구입했습니다. 책은 구입 후 바로 읽지 못하고 시간이 좀 흐른 이제야 읽게 되었습니다.
정유정 작가는 소설 속 시공간을 최소화하여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는데, <진이, 지니>도 주인공 진이의 사고 후 사흘간 벌어지는 이야기라 역시 몰입하며 읽었습니다. 특히 이번 소설은 그간 보여줬던 이기적인 악한 인간들이 아닌 따듯하고 선한 인간들의 이야기라 좀 다른 시선으로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소설은 진이와 민주의 1인칭 시점으로 장마다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클라이맥스까지 이끌어 갑니다.
소설은 주인공 진이가 콩고 왐바 캠프에서 한 달간의 캠프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려다가 비행기 결항으로 킨샤사에서 하룻밤을 묶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동료들 선물을 구입하려고 호텔을 나선 진이는 갑자기 몰아친 폭풍우를 피하려다가 우연히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게 되고 그 곳에서 밀렵꾼에 잡힌 유인원 보노보 지니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밀렵꾼의 보복이 두려운 진이는 인기척에 그 자리를 피하게 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보노보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가지고 테마파크 동물원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영장류 센터에서 사육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영장류 센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독일로 유학을 가기 전날 진이에게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나니 불이 난 별장에 침팬지를 구조해 달라는 119구조대 한기준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스승과 함께 급히 현장을 간 진이는 구조대를 피해 간신히 나무 위에 있는 동물을 발견하는데 그 동물은 침팬지가 아닌 예전 킨샤사에서 외면했던 보노보 지니였습니다. 탈진한 보노보 지니를 구한 스승과 진이는 치료를 위해 급히 어두운 길을 뚫고 영장류 센터로 향하지만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진이와 지니가 차 밖으로 튕겨져나가게 됩니다. 이때 진이가 보노보 지니의 영혼으로 진입을 하게 되고, 진이의 육체는 사고 후 출동한 응급차에 의해 병원으로 향하게 됩니다.
교통사고 직후 사고를 목격하고 신고한 사람이 있었으니 취업준비생이었다가 집에서 내쫓겨 노숙자로 전락한 민주였습니다. 민주는 공익근무 시절 저소득층 도시락 지원일을 하다가 자신을 귀찮게 하던 해병대 노인의 도움을 미처 확인하지 않고 외면하게 되어 결국 해병대 노인의 죽음으로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통사고 현장 근처에서 우연히 보노보 지니 몸으로 변한 진이와 만난 민주는 보노보가 진이임을(낮에 영장류 센터에서 마주친 경험이 있음) 알게 된 후 보노보로 변한 진이를 병원 응급실에 누운 진이에게 데려가기로 천만 원에 계약을 하게 됩니다. 민주와 진이(보노보 지니 몸을 한)는 함께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진이 육체에게 찾아가 영혼을 바꾸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는데 보노보 지니 속 진이가 램프를 통해 지니의 기억 속 세상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게 되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진이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곧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도착한 진이와 민주. 과연 진이가 보노보 속에 그대로 남아 보노보의 삶으로 살아갈 지, 곧 죽게 될 자신의 육체로 들어가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할 지, 선택의 기로에 서며 마지막 인간으로서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진이, 지니>는 그 동안 정유정 작가가 보여주었던 악의 3부작과는 또다른 따듯하고 다정한 소설이었습니다. 14년간 간호사 생활의 경험을 잘 살려 병원 내에서 벌어지는 보노보의 탈출 장면 묘사가 현실감 있게 그려졌고, 죽음을 다루면서도 무겁기보다는 보노보 몸을 한 진이와 민주의 티격태격하는 모습, 민주가 파출소로 찾아 온 아버지를 배웅 하며 아르바이트로 받았던 농산물 상품권을 현금으로 바꾸는 이야기 등 중간 중간 유머스러운 부분도 괜찮았습니다. 거기에 전작에 나왔던 119 구조대 한기준의 출현은 반가웠구요.
무엇보다도 인간과 유전자가 약99% 비슷한 보노보와 인간의 영혼이 바뀌는 판타지물 같지만, 그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공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의미있는 소설이었습니다.
3년에 1번 작품이 나올 정도로 다작을 하지 않는 정유정 작가지만 작가의 오랜 팬으로 다음에는 좀 더 빨리 정유정 작가의 작품을 만나보기를 기대해 봅니다.
ps. 정유정 작가가 <진이, 지니>를 쓰며 들었던 노래 클리프 리차드의 "early is the morning" 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유튜브 영상을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