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부터 내리던 장맛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찜통 더위가 찾아왔다. 내겐 더위를 이겨내는 방법 중 하나가 선풍기를 틀어놓고 책읽기라 어떤 책을 읽을까 거실 책꽂이를 훑어보다가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책의 제목은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이었다.
몇 해 전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소설이라 구입을 했었는데 한창 독서 중인 책을 완독한 후 읽겠다고 잠시 미뤄두었던 것이 책꽂이에 오랜시간 머물게 만들었다(이런 책이 한 둘은 아니지만). 책 제목에 '여름'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요며칠 날씨가 무덥지 않았다면 <바깥은 여름>은 좀 더 오랜시간 만나지 못 했을 것이다.
<바깥은 여름>은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침묵의 미래」와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포함해 7편이 실린 단편소설집이다.
각 단편들의 주제는 사뭇 다르지만 나와 다른 시차의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담긴 책이라 생각이 든다. 단편집의 제일 처음에 자리한 「입동」은 오랜 고생 끝에 장만한 이십사 평의 작은 아파트에서 가족의 행복한 삶을 꿈꾸던 젊은 부부가 불의의 사고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나서 찾아온 아픔과 상실, 타인의 시선을 작가 특유의 담백한 문체로 풀어간 단편이다.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목숨을 잃은 아들. 아들의 죽음으로 받은 보험금을 차마 건들지 못하는 부모, 그리고 아들이 죽은 후 받은 보상금으로 한 몫 잡으려는 건 아니냐는 타인의 시선(아빠의 직업이 보험설계사라는 이유로). 그리고 세상을 떠난 아이에 대한 부모의 애절한 그리움...
두 딸을 둔 아빠로서 어린이집에서 잘못 배송된 복분자 원액이 터져 벽지를 엉망으로 만드는 바람에 다시 새 벽지를 바르다가 발견한 쓰다만 아들의 글씨에 울음을 터트리며 부들부들 떨던 부부의 모습이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지만 2014년 4월 진도 해상에서 침몰한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애달픈 심정을 바라보게 된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 p.21
「건너편」은 오래된 연인들이 겪을 수 있는 이별의 과정을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노량진 수험생 시절 교회에서 수험생을 위해 밥을 제공하는 자리에서 만난 이수와 도화. 도화는 재수 끝에 경찰관이 되어 교통정보센터에서 도로별 상황을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있고, 이수는 6년이나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으나 낙방을 하고 몇몇 직장의 인턴생활을 전전하다가 부동산 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있다. 가난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사랑하며 동거를 하게 된 이수와 도화. 시간이 흐르면서 도화는 이별을 준비하지만 매번 일이 생겨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된다.
크리스마스 이브를 앞두고 이수는 마지막으로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회사를 관두고 전세금에 손을 댄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이수는 아는 형님이 한다는 횟집을 찾아 노량진수산시장으로 도화를 데리고 가는데,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은 이수와 도화의 8년간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된다.
대학 1학년 때 주위의 부러움을 가득 안고 연애를 시작한 CC가 있었다. 당시 남자 동기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여자 동기는 의외(?)의 남자 동기와 CC가 되어 오랜시간 연애를 했는데 졸업 후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 모임에서 둘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동기들 이야기로는 성격차이로 헤어진 것 같다고 했지만 오래된 연인의 이별이 대개 그러하듯이 단점도 가릴 수 있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더 이상 남지 않아서 이별하지 않았을까?
- 이수야.
- 응
-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냐.
- ...........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 .......... - p.115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젋은 작가상 수상작으로 계곡에 빠진 제자를 구하려다가 세상을 떠난 남편을 원망하던 아내가 목숨을 살렸던 제자의 누나 편지를 받고 남편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사랑하는 자신을 두고 제자를 구하기 위해 계곡물로 뛰어든 남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는 스코틀랜드에 사는 사촌언니가 한 달간 집을 비우는 동안 머물 생각이 없냐는 부탁에 홀로 스코틀랜드로 몸을 싣는다. 에든버러에서 아내는 시간을 아끼거나 낭비하지 않고 도랑 위 쌀뜨물 버리듯 그냥 흘려보낸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아내는 남편이 살아생전 주말마다 스마트폰의 인공지능 기술인 '시리'에게 짓궂은 질문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는 '시리'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하게 된다.
-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시리가 되물었다.
- 어디로 가는 경로 말씀이세요?
- ..........
- 어디로가고 싶으신거에요?
- ............
- 죄송해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 ............ -P.259
스코틀랜드에서 유학간 대학동기를 만난 후 계획보다 일찍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아내는 남편이 구했던 제자의 누나가 쓴 편지를 받고서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살려주세요. 소리도 못 지르고 연신 계곡물을 돌이켜며 세상을 향해 길게 손 내밀었을 그 아이의 눈이 아른댔다. 당신을 보낸 후 줄곧 보지 않으려 한 눈이었다.(중략)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 P.266
2001년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이 선로에 떨어진 생면부지의 일본인 취객을 위해 목숨을 던진 일은 소설 속 문장처럼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지금도 어느 곳에선 위험에 처한 타인을 구조하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할 겨를 없이 숭고한 의(義)를 펼치는 의사자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 밖에 「노찬성과 에반」에서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찬성이가 노견인 에반을 만나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에반의 병색이 심해지자 안락사를 해주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혼자가 된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침묵의 미래」에서는 사라져가는 언어들의 마지막 화자들이 가상의 강대국이 만들어놓은 '소수언어박물관'에 모여 박제처럼 생활을 하다가 하나 둘 사라져가는 모습을 영(靈)을 통해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풍경의 쓸모」에서는 교수 임용을 바라보는 시간강사 화자가 임용에 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곽교수의 난처한 상황을 도와준다. 이 후 교수 임용을 고대하며 추운겨울 따뜻한 태국으로 가족여행을 떠나는데 곽교수의 반대로 교수 임용에 탈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게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리는 손」에서는 아빠 없이 한국인 엄마와 단둘이 사는 다문화아동인 제이가 십대 무리와 실랑이 끝에 죽은 노인 폭행 사건의 목격자가 된후 타인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되면서 겪는 모습을 통해 너무나 손쉽게 생각했던 편견들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오늘 바깥은 곳곳에서 소나기가 내렸지만 최고 기온이 30도가 웃돌 정도로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바깥은 여름이었지만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는 다른 시차의 계절이었을 것이다. 아들을 잃은 젊은 부부, 무더운 태국으로 가족여행을 떠났지만 고대하던 교수 임용에 떨어진 정우, 반려견 에반을 잃고 혼자가 된 찬성이, 미래를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이수와 헤어진 도화...
<바깥은 여름>에서 김애란 작가가 담아낸 7편의 단편들은 타인의 이야기였지만 그저 소설 속 나와 상관없는 타인의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때로는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공감하며 타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소설 속 타인들의 삶은 저마다 녹록지 않았겠지만, 소설 밖에서의 타인들의 삶은 시원한 여름을 맞이했기를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