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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흐림이라고 대답하겠다

[도서] 그냥 흐림이라고 대답하겠다

배연수 저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요즘 새로운 운전 습관이 하나 생겼다. 시내를 주행하다가 신호에 걸렸을 때 예전엔 스마트폰을 열어 별 관심도 없는 기사를 뒤적거렸다면, 요즘은 조수석에 시집을 한 권 놓고 신호대기하는 몇 초에서 몇 분 사이의 시간에 시 한편을 읽고, 주행하는 동안 그 시를 곱씹는다. 읽다가 중간에 끊기고 출발하게 되면 그 다음 구절이나 내용을 짐작하는 재미도 있다. 


시집 한 권을 읽는다는 것은 모래사장에 숨겨진 구슬 몇 개를 손으로 살살 훑어 찾아내는 일인 것만 같다. 모래판 전체가 시집 한 권이라면, 그 안에서 눈과, 기억과, 가슴으로 울림있는 시편 하나쯤 찾아내고야 마는 기쁜 놀이. 이 시집은 블로그 친구이기도 한 작가님의 친필 사인이 들어있는 시집이라 더 귀하다.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이지만, 그 시인의 시선과 감정을 추측하고 나와 비슷한 감정의 결을 찾고 또 찾아낸 데서 감동하는 짜릿한 작업이었다. 


<면접>

사월이 되자마자

제비 한 마리 찾아왔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있던 중이었는데

마음 급한 제비는 대뜸 집부터 둘러봅니다

현관 앞과 옥상

처마 아래까지 꼼꼼하게 살펴봅니다


나는 공연히 마음이 찔려서 

취업준비생처럼 눈치를 살핍니다

얼떨결에 면접을 보는 꼴이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별일 아닌 척

마당 위 전깃줄에 앉아보고

창고 지붕도 한 바퀴 돌아보고 있지만

제 새끼들 키울 둥지 귀하게 여겨줄

사람 그릇 보러 온 것 아니었을까요


마시던 커피 내려놓자

제비에게 면접 당하고 있는 나를

누군가 빤히 보는 듯합니다

하던 대로 하라고

꾸미려 할수록 드러나는 게

제 바탕이라고 훈수 두는 듯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년에 같은 일로 탈락 경험이 있기에

여간 주눅 든 것이 아닙니다

면접자 사정을 일일이 봐줄 수 없는 제비는

볼 거 다 봤다고 높이 날아갑니다

흑백 주사위 하나가 공중에 던져진 모양입니다


제비가 우리 집을 보러 왔다. 새끼들과 함께 살 만한 집인가를 보러 말이다. 집주인인 내가 오히려 제비의 면접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취업준비생처럼 느껴진다. 생각지도 관계의 전복은 이렇게 신선하다. 전국의 학교가 온라인 개학 준비로 뒤숭숭하다. 되니 안되니 해도, 전세계 교사 집단 중 가장 우수하고 명석하고 모범적인(그리고 보수적인) 집단인 우리나라의 교사들이 다같이 달려들어 방법을 찾고 있으니 아마 얼마 가지 않아 자리잡고 정착을 하게 될 거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수업이 온라인에 공개되게 되면, 이 시의 집주인처럼 될 거다.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 학생 뿐 아니라 이 온라인 학습을 바라보는 모든 국민들의 평가를 받는 입장으로 말이다. 아마 국민들이라는 제비는 면접자 사정을 일일이 봐줄 수 없다고 냉정하게 날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느낌은, 흑백 주사위 하나가 공중으로 높이 던져져서 땅에 떨어지기 전 빙글빙글 돌며 과연 숫자가 얼마 나올까 하는 두려움 섞인 궁금증이다. 


새끼 새의 눈동자는 씻어 말린 서리태같다


호랑지빠귀는 지렁이를 새끼에게 먹인 뒤 

그 배설물을 받아먹는다

다른 새들이

새끼의 배설물을 멀리 갖다버리는 것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조금씩 떨쳐낼 동안

이 어미는 새끼가 둥지를 떠날 때까지

자식의 치켜든 엉덩이 앞에 주둥이를 대고

기다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요양원에는 기억을 자식에게 양보한

부모 새들이 모여 살고 있다

다 자란 자식들이 자신의 일에 매달려 있는 사이

쪽배처럼 간당거리며 떠나온 부모들이다


떠난 새가 돌아와

늙은 어미 새의 엉덩이를 지켰다는 소문을 들은 적 없듯이

부모의 배설물을 보았다는 자식도 드물어졌다


이젠 들여다볼 수 없지만 

새끼 새의 눈동자는 씻어 말린 서리태같았는데

그것도 낮 꿈처럼 지금은 아득해졌다


씻어 말린 서리태의 새까만 선명함과 낮꿈의 아득함이라는 이미지 대조가 확 다가든다. 네 살배기 아들녀석의 서리태같은 까만 눈동자를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나의 배설물을 보았던 부모의 과거에 조금씩 공감한다. 자식의 똥 뭍은 엉덩이를 기꺼이 닦으면서도 끊임없이 나의 시간을 양보하는 대신 여섯 살, 네 살배기와 시간의 선을 가지고 다투는 내 이기심을 반성한다. 기억마저 새끼에게 양보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필요할까 생각하면서 


미니멀리스트


없어져도 아무렇지 않은 묵은 살림을

열심히 버리는 중이라던 친구가 

문득 자신이 뭔지 궁금해졌다는 말을 했다

그를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억상실증 환자들이 물리적 자극에 반응하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겹쳐지면서 선명해지는 그늘처럼

그는 조금씩 그를 맞춰갔을 것이다


그가 다녔던 장소와 가진 물건을 들춰내며

냄새를 킁킁 맡으며

퍼즐 맞추기보다 더 의미있는 시간이라고

자신을 다독이면서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마지막 이야기는 남겨두고

일어서는 것이 좋았다


일생 동안 살림에 묶여 있어도

우리가 생각보다 무척 가볍다는 것을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말할 때

단 세 줄의 문장도 길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을 자신의 부재에 대해 

곧 떠올리게 될 테니


'우리가 생각보다 무척 가볍다는 것을' 이라는 구절을 읽은 내 느낌을 문장 부호로 표현하면 느낌표가 될까, 말줄임표가 될까. 누구의 무엇, 또는 어디의 누구라는 수식어를 빼고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면 나의 존재는 무척 가벼워진다. 끊임없이 채우려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 몸과 마음은 반대 방향의 화수분인지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지만 그것들이 나의 본질을 둘러쌀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어딘가의 누구로서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다가 문득 그것들을 내려놓았을 때 나를 말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이렇게 시는 한 마디의 말로 나를 멈추게 하고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에 대해 시인은 다시 이렇게 이야기한다. 


서시


거울을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거울은 보이지 않는다

거울을 보고 있는 내 모습만 비칠 뿐이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책장을 펼치면 책 속의 글자보다

그것을 읽고 있는 내가 보인다

꼭꼭 감춰놓았던 나를 그대로 비춰주기에

거울을 보고 책을 읽듯

가만히 너를 바라본다

잔물결조차 허용하지 않는 한낮의 연못인 듯

나의 그대로를 비추는 너


 <그냥 흐림이라고 대답하겠다>에 실린 시편들에 사용된 시어들은 결코 어렵지 않다. 일상에서 쓰이는 말들을 그러모아 다시 일상의 장면을 재현했다. 하지만 그 일상어의 결합은 내것과는 달라서 그 연결마디가 어색하고 이면의 의미를 쉽게 생각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 틈새와 빈자리는 나의 기억과 내 모습을 돌아보는 것으로 채운다. 그래서, 시를 읽지만 그 시를 통해 나를 돌아보는 것이 된다. 그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너 역시 보게 되고 그것은 결국 삶과 관계를 돌아보는 일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시들 곳곳에 스며 있는 비애는 일상이 모여 이뤄진 삶이 대상과의 관계를 언제나 지향하지만 그것이 언젠가는 헤어지거나 끊어질 수밖에 없음을 또다시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관찰한 결과이다. 그래서, 누군가 삶이 멈추는 순간 그 삶을 돌아보며 가장 적당한 말을 고르라면 '흐림'이라고 대답하는 이유는 그 숙명적인 흐름을 알고서 차오른 눈물이 눈 앞을 뿌옇게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눈에도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끊어놓아 역설적으로 누군가가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 그들과 이어진 끈을 느끼고 싶다면, 이 시집을 읽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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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수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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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march

    좋은 방법인것 같은데요. 조수석에 시집 한 권 둬야겠어요~~

    2020.04.03 13:39 댓글쓰기
    • 뒤차의 빵빵거림에 종종 놀라게 되는 부작용은 있습니다.^^

      2020.04.04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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