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안개는 풍경을 지우며 / 풍경을 그린다
안개는 건물을 지워 / 건물이 없던 시절을 그려놓는다
안개는 나무를 지워
무심히 지나쳐 보지 못하던 나무를 그려보게 한다
안개는 달리는 자동차와
달리는 자동차 소리를 나누어놓는다
안개는 사방 숨은 거미줄을 색출한다
부드러운 감옥 안개에 갇히면 보임의 세계에서 해방된다
시선의 밀어냄을 흡수로 맞서며
눈동자에 겸손 축여주는 안개의 벽
안개는 물의 침묵이다
안개는 침묵의 꽃이다
보지 않아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게 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도 충분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안개의 속성을 통해 절묘하게 포착해낸 멋진 발상이 돋보인다. 없어져 봐야 원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고마움을 알게 되는 것이 변치않는 세상의 이치일텐데 그걸 평소에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흔치 않다. 자연은 안개를 그런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워주는 듯도 하다.
삼사일언의 마음으로 내 말을 아끼고 상대가 말하게 하면, 내보이지 않던 상대의 마음이 보인다. 비난과 반항의 언어로 자신의 마음을 가린 거친 아이들의 이야기에 어른의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그냥 가만히 얼굴과 손을 바라보면서 내 입을 닫으면 스스로 그 껍질을 내려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침묵이 피워주는 꽃이다.
관중의 소리가 사라진 야구장의 그라운드에는 야구공을 때리는 청량한 타격음과 선수들이 서로를 격려하는 덕아웃의 환호, 3루를 향해 달려오는 주자를 재촉하는 주루 코치의 애타는 재촉이 울린다. 스파이크가 흙을 긁는 소리와 포수가 공을 받는 소리가 깊은 숲속 도끼로 나무 찍는 소리처럼 정정하게 울린다. 스스로가 내는 소리에서 스스로를 분리했던 선수들은 그동안 당연한 줄 알았던 자신들을 향한 관중들의 환호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반대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언론은 마땅히 밝혀야 할 것을 안개로 뒤집어씌워 그 안개로 다른 말을 한다. 진실을 가리고 읽는 이를 안개 감옥에 가둔다. 바이러스로 우왕좌왕하며 가야할 길을 찾는 우리에게 안개 너머 있는 진실을 그들의 방식으로 드러내려하지 않고 오히려 자극적인 언어들로 겹겹이 감옥 안개에 가두고 있다. 펜대를 잡고 안개의 겸손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안개 장막 너머의 풍경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