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총>
공기를 짓이겨 / 공기를 압축하여
공기를 쟁기질하며 나는 새나
사람보다 빨리 달리는 짐승을 잡던 / 총
우리들의 폐에 날아와 박히고 있다
우리들이 경쟁적으로 내뿜는 산업화 열기에
깨 진 오 존 층 파 편 이
납덩이가 되어
산탄 외탄 총알이 되어
주말이면 어린아이 손잡고
숲으로 강으로 피난 나갔다 돌아오는
산으로 바다로 치료받으러 갔다 돌아온
우리들의 몸에 정신세포에 날아와 박히고 있다
과녁이 과녁을 향해 총을 쏘아대다니
공기는 총이 아니었으나
생명을 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맑은 공기의 세계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추방되어야 할 뿐
공기가 오염되었다고 공기를 향해 입을 겨누어서는 안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주 많은 인간들의 활동을 멈추어버렸다. 비행기와 배가 덜 다니고 공장이 멈추자 놀랍게도 자취를 감추었던 멸종 위기종이 돌아오고, 대기는 맑아졌다. 사실은 지구가 스스로의 정화를 위해 바이러스를 인간들에게 퍼트린 건지도 모른다는 음모론(?)도 횡행한다. 덕분에 인간이 지구의 입장에서는 건강을 좀먹는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과, 끝없는 생산과 소비를 더 많이 요구했던 자본주의 경제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세계적으로 퍼졌다는 것이 참 역설적이다. 오월도 중반을 넘어서는 이주 주말에 태풍이 올라온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면서 자연의 조화란 여전히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저 편에 있다는 걸 새삼 생각한다. 이러한 인식을 집약한 구절이 “공기는 총이 아니었으나 생명을 총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맑은 공기의 세계에서 우리는 자발적으로 추방되어야 할 뿐”이다. 연기와 먼지 내뿜는 일터에서 돌아와 집에서는 쉬어야 하나 우리가 짓이겨버린 삶의 공간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그나마 주말이라도 되면 숲으로 강으로 산으로 바다로 치료와 피난을 위해 다녀와야 하는 시대. 코로나가 그 시대 밖으로 우리를 조금 밀어내어 주었다. 지내던 공간 밖에 나와서 내가 있던 공간을 돌아보는 것은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든다.
<태풍>
태풍은 온다 먼바다 큰 바다에서
수직한 것들이 수평을 절감해보는 날
지하의 뿌리들에게 / 지상의 몸들을 치열하게 읽어보라
지상의 몸들에게 / 지하의 뿌리들이 땅 움켜쥐는 소리 들어보라고
태양 조명 끄고 구름 스크린 휘날리며
아, 저 많은 바람은 다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가 / 태풍이여
수직한 것들의 근심을 뿜어올려주는
건물의 명함인 간판을 뒤흔들며 호명하는
수평도 차오르면 위험하다고 댐의 수위도 조절시키는
티브이 채널을 물과 바람의 나라 생중계로 통폐합하는
움직이는 기체의 닻으로 고체들의 욕망을 정박시키는 / 태풍이여
수직한 것들의 호구조사 날
사람인 나는 유리창에 테이프로 X자 붙이고
수평으로 누워
너의 이동경로를 추적하며 / 또다시 불안을 쌓아올린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깨어있는 동안 대부분 수직으로 서 있다. 인간이 쌓아놓은 거의 모든 것들 역시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올라간다. 그것들이 바닥으로 눕혀져 수평을 가늠하는 날이 태풍이 오는 날이다. 그리하여 자기가 어디에 뿌리를 박고 살아왔는지 그 출발점을 생각하게 된다. 태풍은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으나 그 기체 덩어리의 힘으로 고체들을 제자리에 눌러앉히는 것도 모자라 땅 가까이로 누르며 ‘기체의 닻으로 고체들의 욕망을 정박시킨다.’ 자연은 이렇게 인간의 욕망과 근심을 날려버리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자연을 어머니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도 있다.
<농약상회에서>
치마 아욱 / 마니따 고추 / 장한 열무
제초대첩 제초제 / 부메랑 살충제 / 아리랑 쥐약
먹을 것 생산해줄 씨앗들과
먹을 것 먹어치우는 것들 죽일 약들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향기롭던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면
역한 냄새로 판별하는 내 감각 / 반성해보다
슈퍼 옥수수 / 슈퍼 콩 / 슈퍼 소
꼭 그리해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작아지는 방법을 연구해보면 어떨까
앙증맞을 집, 인공의 날개, 꼬막 밥그릇
나뭇가지 위에서의 잠, 하늘에서의 사랑
무엇보다도 풀, 새, 물고기 들에게도 겸손해질 수 있겠지
계산대 앞에서
푸른빛 쏟아질 듯
흔들리는 아욱 씨앗 소리
장날이 되어 가끔 종묘사 앞을 지나다보면 참 재미난 이름들을 본다. 작은 봉투 안에 든 씨앗의 품종은 물론 그것이 지향하는 바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게 지은 이름들이 마니따 고추, 장한 열무 같은 이름들이다. 피어날 이름 뿐만 아니라 지게 만드는 이름들도 마찬가지다. 제초대첩이라니. 뿌리는 이를 마치 이순신 장군으로, 잡초를 마땅히 죽여야 할 왜구로 느껴지게 하는 멋들어진 이름 아닌가. 분명 종묘사에서는 그것들이 극명하게 갈려있지만 둘의 기착지인 인간의 입 속에서는 그 둘을 구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가는 곳을 모를 슈퍼 옥수수, 슈퍼 콩, 슈퍼 소를 만들어낸다. 수천 수백만 년간 서로에게 해가 가지 않을 만큼 공존의 거리를 두고 진화해 온 것들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망가뜨려버린 인간들은 곳곳에서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고엽제 전우회-그들이 이용당하는 정치적인 맥락을 차치하고라도-의 아픈 이들은 그들을 아프게 한 원흉 대신 다른 이들과 싸우고 있으며 슈퍼 콩을 먹고 불임과 난임 심지어 기형아를 출산한 엄마들의 마음은 누가 달래주고 있는가. 이 곡물과 가축을 키우기 위해 인간에게보다 더 많은 식량과 자원을 투자하고 있는 것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본적 없는 주객전도다.
시인은 그리하여 우리에게 겸손해질 것을 동화적인 상상으로 제안한다. 타자를 키우지 말고 우리가 작아지면 된다. 밥은 꼬막 껍질에 담아 먹고 나뭇가지는 잠을 자는 평상이 된다. 몸이 가벼우므로 인공의 날개를 달아도 하늘로 날아오를 수도, 그곳에서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 몸이 차지하는 영역은 줄어들지만 누릴 수 있는 영역은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화자와 공명한 아욱 씨앗이 푸르게 흔들린다. 자연에 대한 겸손을 생각함으로써 찾아가는 생명의 공명. 코로나 바이러스가 치사율을 가지고 우리에게 생각하기를 강요하는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