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이 책을 펴기 전에.
노약자, 임산부 및 심신이 허약하신 분은 얼마든지 괜찮지만 배타적인 유일신교 신봉자는 이 책을 읽는 것을 멈춰주시라. 우리 전통문화 속에 남은 신(神)들의 흔적에 대해 미신이니 비과학적이니 하는 논쟁은 끝내고 오시기 바란다. 참고로, 내 종교는 카톨릭이다. 문화라는 관점에서 그들을 바라보지 못하는 이와 이 책의 가치를 논하는 것은 술자리에서 정치 이야기하는 것 만큼이나 부질없는 헛짓이니까.
<신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은 교과서에도 그 글이 실린 저자 이상권 씨가 청소년들이 우리 전통 문화 속 신들의 흔적에 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책이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생들의 수준에 잘 맞을 것 같고, 이 분야에 상식이 부족하거나 고전문학 읽기의 배경 지식을 쌓고자 하는 고등학생들도 유용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권선징악이라는 윤리, 도덕적 사회 규범의 유지, 현실의 어려움과 욕망의 해소 및 실현 수단, 전통문화의 정체성 유지라는 기능을 이 신들의 모습과 일화, 권능을 통해 두루 살필 수 있다. 착하게 살던 나무꾼에게는 복을 주고 못된 짓을 하는 욕심쟁이는 호랑이가 물어가 벌을 준다. 귀한 자손을 낳게 해달라고 삼신 할머니께 빌기도 하고 오방색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복을 받기를 기원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역병은 때로는 높으신 마마처럼 모시기도 하고 해볼 만하다면 힘센 신장(神將)들이 물리치기도 한다. 죽은 이들의 곁에는 사신(四神)들이 네 방위를 지키고, 한맺혀 죽은 임경업과 최영 장군은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준다. 여기서 들어준다는 것은 listen의 의미도, make it의 의미도 된다. 결국 신들의 모습 뒤에는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인간들의 바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미신으로 치부한다면 결국 인간의 삶에는 무엇이 남는가. 그러면서, 영화 <신과 함께>가 재미있다고 박수치는 건 반칙이다. 홍익인간의 정신을 말했던 단군 이야기를 읽으면서 개인으로서는 결코 이겨낼 수 없는 역병 창궐의 시대에 공동체 정신을 일깨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또 읽어볼 만하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글이므로 글자수는 상대적으로 적고, 풍부한 시각자료들이 함께 실려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또다른 장점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 보니, 고전문학을 학교에서 읽고 가르치는 나도 처음 보는 신들이 있었다. 그렇게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먼 친척 할아버지를 만난 느낌이었지만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요즘 히트하고 있는 가수 이날치의 노래(종합 퍼포먼스?) '범 내려온다'를 남녀노소가 흥얼거리는 걸 보면서 아직은 국악의 가락과 그 특유의 창법을 즐기던 유전자가 남아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분단이 된 지 이미 80년이 훌쩍 넘었다. 세대로는 4개 쯤. 이제 개인적인 연으로 너와 내가 합쳐져야 한다는 명분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결국 과거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 씨앗을 심어줄 수 있는 보고이다. 거기에서 어떤 꽃을 피울지,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그 세대의 몫이다. 수천 년 동안 같은 이야기들을 시대에 맞게 각색해 후대로 이어왔던 이 땅의 선조들과 같은 공동체에 진입하도록 돕는 것이 우리말글을 가르치는 이들과 앞서 살아온 어른들의 책무이며, 이 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어볼 만한 이유이다.
북쪽의 사상과 남쪽의 자본의 지워버린 우리 신들의 세계가 민족 공동체 회복의 단초가 되고, 언택트와 문화의 시대에 우리의 새로운 살 길이 되어줄 컨텐츠 창작의 원형이 되어줄 수 있다. 서유럽 문화의 재생산에 질린 헐리우드 자본이 북유럽 신화에서 토르를 찾아낸 것처럼 노르망디에 우리의 바리공주가 사뿐히 내려설 수도 있고, 동유럽에 찾아온 고대의 악마가 우리의 오방신장에게 두들겨 맞을 수 있고, 이 망할 코로나를 처용이 물러가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