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를 다니던 90년대 초반, 사회과 부도에서도 있는지조차 몰랐던 '소말리아'의 등장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머리는 큰데 몸과 팔다리는 삐쩍 말라 로스웰의 외계인같은 모습을 한 어린이들의 모습으로 나타난 소말리아는, 비쩍 마른 아이들의 별명으로 통일되었고, 반찬 투정하는 아이들에게 소말리아에서는 이것도 없어 못 먹는다며 부모들이 날리는 관용구로 정착되었다. 불쌍한 나라, 도와주어야 할 나라이면서도 현실같지 않은 묘한 이질감이 공존하는 나라였다. 그렇게 전 세계로 굶어죽는 사람들의 영상과 사진이 전송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모가디슈>라는 영화가 배경으로 한 시점, 1990년이다.
영화는 오랜 세월 권력을 독점해오던 군부 독재자가 쿠데타로 축출되고 반군들이 세력을 확장해가면서 무정부상태로 급속히 진행되는 소말리아 내전의 시작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만 외부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한국과 북한 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의 탈출기를 그리고 있다. 지금같으면야 SNS로 상황을 알리면 대한민국 국적기가 특수부대와 함께 당장에 진입해서 외교관과 가족들을 구해내겠지만 그땐 1990년이다. 통신선이 끊기면 외부와 연락할 수단이 아예 없다. 통신이 두절되고 반군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어도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본국에 알려지게 된다는 뜻이다. 새삼 우리가 굉장히 편리하면서도 문명의 이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얼마나 위태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거기에 오랜 세월 정치적, 경제적으로 억눌렸던 사람들의 손에 총이 쥐어졌다. 심지어 아홉살도 안 되어 보이는 꼬마들도 연발로 장전된 총을 장난감삼아 갈기며 거리를 활보하는 세상. 지폐가 자루로 있어도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세상. 군중들의 분노에 잘못 노출되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당장에 피와 뼈가 분리되는 세상. 의료는 커녕 힘없는 이들을 지켜줄 어떠한 공권력도 없는 세상.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 가운데 지옥도 혹은 수라도의 실사판이라고 보면 되겠다. 슬픈 것은, 그때 발발한 내전 이후로 30여 년이 된 지금까지 그 세상이 진정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그 세상에서 탈출하려면 그나마 평소 친분이 있던 다른 외국 대사관을 통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 한국 대사 한신성(김윤석 분)은 북한 대사관과 힘을 합쳐 필사의 탈출을 시도한다. 이 영화는 당시의 소말리아를 재현하기 위해 모로코에서 올로케로 활영했다고 한다. 올로케를 시도했던 전작 '베를린'에 비하면 개인 액션보다 차량을 이용한 추격과 총격씬의 비중이 크다. 류승완이라는 이름 옆에 늘 붙어다니는 '액션'이라는 단어보다는, 이 영화에서는 트럭 위에 십수 명의 소말리아인들이 매달려 낄낄거리면서 수시로 하늘로 총을 갈겨대는 광기어린 상황의 재현에 주목하는 것이 영화를 더 몰입해서 볼 수 있는 비결이다.
굳이 소말리아 내전이라는 실제 배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때로는 현실 가장의 모습을, 때로는 대립하는 직원들 사이를 유들유들하게 조정하는 직장 상사의 모습을, 때로는 어려운 결단을 과감하게 내리는 외교관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연기하는 김윤석이 보는 이가 극에서 빠져나가도록 놔두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생사를 넘나드는 길을 함께 헤쳐나온 남과 북의 대사관 직원들을 기다리는 건 각 국가의 보안기관 요원들이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땐 여전히 때마다 반공 글짓기, 반공 웅변대회가 열리고 삐라도 심심찮게 발견되던 시절이다. 죽을 고비를 넘긴 석별의 정을 함부로 표시내다간 이 길이 생환의 길이 아니라 지옥문을 다시 여는 길이 되는 거다. 그 아쉬움을 눈빛에 담고 등으로 표현한 허준호의 무게감도 볼 만하다. 그새 들었던 정을 접어두고 각자의 길로 등돌린 버스가 출발하는 모습을 보는 마음이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를 보고 난 일부 관객들이 남북 화해를 팔아 눈물을 짜는 게 지겹다는 평도 하던데, 이 영화는 실화다. 생김새 비슷하고 같은 말을 쓰는 이들끼리 새끼들의 목숨까지 주렁주렁 달고 사선(死線)을 함께 넘었는데 그 사실을 삐딱하게만 보는 건 정치병 환자로서의 주체의식인지 그저 속이 배배 꼬인 방구석 워리어인지 모르겠다. 남북의 이야기를 떼어놓고 보더라도 우리가 선택할 순 없었지만 얼마나 천운을 타고 태어나 저 수라도같은 땅이 아니라 이 평온한(적어도 총질은 안 당할 수 있는) 나라에 태어나게 되었는지 조상에게 감사할 수 있는 영화다. 두 사람이 평일 낮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2만원대 중반이 들었다. 기꺼이 지불하면서 코로나가 종식될 그날까지 극장이라는 곳이 살아남아 기다려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하루의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는데 2만원 정도면 충분히 쓸 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