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 타고나는 모성을 바탕으로 자식에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여성(x)
엄마 : 자신과 같은 상처를 알아보고,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면서 기꺼이 곁을 내 주는 사람(o)
영화를 보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심란한 아동학대의 현실을 생각하면 '엄마'라는 단어의 정의를 이렇게 좀 새로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게 해야 때로는 법적 구속력까지도 지니게 되는 혈연, 천륜이라는 단어의 고개를 넘고 지나치게 협소해서 때로는 족쇄가 되기도 하는 어려움을 넘어 고통받는 아이들을 구해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학대하는 부모가 전체 부모 중 일부이고, 혈연이 아님에도 아이를 돌보겠다고 혹은 함께 해 주겠다고 했던 이들 가운데 아이를 학대하는 이들 역시 그 중 일부라면, 반대로 생각하면 좋은 의미로 아이와 함께 해 줄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훨씬 넓어지는 거 아닐까.
"아이들 학대하는 부모가 수십만이라는데 아이를 보호해줄 수 있는 시설은 동네 노래방 개수보다 적다는 게 말이 됩니까. 씨바꺼."
라는 대사에서 정부라는 거대한 공적 조직이 아동보호시설 체계를 일사불란하게 정비해 나가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그것과 함께 선의를 가진 주변인들의 도움을 제도적으로 보장해줄 수 있는 조치가 함께 가야함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캐나다에 가면 지역자치단체마다(아마 우리로 따지면 읍면동 단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보호가 필요한 청소년들이 무상으로 거주하면서 자활을 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 그런 시설을 우리나라에 확충한다고 하면 아마 다음과 같은 반대 여론이 곧장 나타날 거다.
"나쁜 애들끼리 모여 살면 비행을 확대 재생산 할 거다. 그런 혐오(?) 시설이 들어오면 우리 동네 땅값, 집값이 떨어질 거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지. 게임에만 빠져있는 생부. 아이 앞으로 나오는 기초생활 수당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강아지만도 못한 대접을 하며 욕실에 가두고 손톱이 짓이겨지도록 때리고 밥을 굶기고 온갖 모멸을 주고...... 오죽하면 고작 아홉 살짜리가 욕실 창문을 통해 전깃줄을 잡고 가스관을 타고 3층에서 탈출을 시도하겠느냔 말이다. 일단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은 건져놓고 볼 일이고,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으로 행동하더라도, 좀 주면 될 거 아닌가. 우리나라, 충분히 그럴 만큼 넉넉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언제 넉넉하게 줘 본 적이나 있던가. 방금 죽을 지경에 있다가 나왔으면서도 자신을 안아주는 미쓰백에게 곁에서 자기도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주인공 지은이의 맑은 눈을 통해 미쓰백이 자신의 과거와 직면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의 마음,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듯 나 역시 애비로서의 나를 보느라 영화를 보는 내내 아프고 힘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 수 없게 된 원인이 이 아이 때문인양 귀찮아하고 영혼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그나마 열에 일곱은 얼굴도 돌리지 않은 채 말하던 나의 모습. 그래도 자기 삶을 멈추고 지은이를 바라봐주던 미쓰백의 모습 덕분에 나도 변명하는 대신 나의 모습을 그냥 바라보고 직면해 볼 수 있었다.
오늘 저녁에도 끊임없이 조잘대로 동생과의 다툼을 일러바치고 인정받으려 하고 입에 밥을 물고 거실에서 쿵쿵대겠지만, 화를 내든 안내든, 나를 바라보는 딸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할 거다. 애정을 주고 진심을 다해 아이를 대한다는 게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 같아 힘들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내가 언제 그렇게 듬뿍 칭찬하고, 사랑의 샘 속에 푹 잠기도록 안고 보듬어 준 적이 있었는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아이'라는 거푸집에 잘라 맞추려 아이를 깎고 조이고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한다.
아동학대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보며 "내가 적어도 저 쓰레기들 같지는 않지."하고 안도할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를 돌아보고 오늘 아이와 만날 나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이 많아져서 미쓰백도, 지은이도, 미쓰백을 지켜주는 장섭이도, 장섭의 누나도 각자의 몫만큼, 자기 방식대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