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문자 한통을 보내면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 개선 사업"에 2천 원이 기부된다는 해비타트 캠페인에 참여했다.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니고 선물(윤동주 시가 각인된 플러스 펜)까지 준다는데 참여 안 할 이유가 없다. 고맙다, 잊지 않겠다 말은 하면서도 실제 못질, 망치질, 외로움을 달랠 방문 한 번 하지 않으면서 손가락 몇 번 놀려 정신적 자위를 얻는 것이 잘 하는 짓인가 싶기는 했다.
그나마, 주변의 증언, 역사적 증거, 본인의 생존을 통해 독립에 공이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이들은 그렇게 행운아(?)일 수가 없다. 세계 도처에서 이름없는 풀처럼 스러져 간 이들은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해준 것 없어도 그저 내 나라이고 내 땅이고 내 자식들이 왜놈들 군홧발에 짓밟히지 않는 세상을 물려주려고 자기 자식에게는 지독한 가난과 못 배움을 물려준 이들. 인간으로서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을 믿었던 그들을 해방된 조국과 그리고 그곳을 장악한 위정자들은 얼마나 가혹하게 배신했던가.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명동. 시인과 화가, 소설가들이 늘 머무는 오리엔타르 다방. 전날 밤 있었던 유명 시인 백두환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육군 특무단 소속 조사관(김상경)이 다방에 찾아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젊은 여성이라는 한계를 넘어 다방에 머무는 모두의 뮤즈로 여겨지던 한 여인과 친일의 오명을 썼지만 인정받는 실력파 시인의 동반 죽음. 정사(情死)인지, 자살인지, 타살인지. 그들의 죽음과 서로 간의 관계가 마치 일본 영화 <라쇼몽>에서처럼 과거와 현재를 마구 넘나들며 퍼즐처럼 맞춰져 간다.
회상 장면에서 일부 다른 장소가 나오긴 하지만 대부분의 공간이 다방 안이고, 극의 전개가 각각의 인물과 수사관이 나누는 대화를 따라 전개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연극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다. 배우들 역시 이점을 잘 아는 듯 감정과 표정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면서 구성의 묘미를 더 살려내는 데 노력하고 있어 마치 소극장에서 공연을 보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사건의 조각을 짜맞춘 결과, 그 둘을 죽인 것은, 그 두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어 그 입을 막고자 수사관 본인이 벌인 살인극이었던 것이 밝혀진다. 그는 이를 알지 못하는 다방의 예술가들을 조사해서 여차하면 입을 막을 속셈이었고, 그들 각자의 감정과 죄의식이 어우러져 결국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살해당하고 만다.
이 수사관은 일제 강점기 우리 청년들을 징용하러 다녔던 헌병 장교였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그는 살아남았고 다만 옷을 바꿔 입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동일하게 '애국'이다. 황국신민으로서 천황 폐하를 위해 몸 바치자던 군인이 이제는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헌신하자고 외친다. 자신의 언행과 행동이 정당화되려면 자신의 신념을 위협하는 적(敵)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날 다방에서 죽은 이들은 모두 죽은 후에 '간첩단'이라는 새로운 직함을 얻게 되고, 수사관은 간첩단을 일망타진한 애국자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게 된다. 딱 한명 살아남은 젊은 소설가는 이 사건의 목격자로서 그의 영웅담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살아있는 증거물이 된다. 공포에 짓눌려 말해야 하는 대사는 수사관이 시키는대로 해야 하지만,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말하는 죄책감은 온전히 그의 몫이다.
식민통치가 끝나고 이념 대립의 광기가 휩쓸던 시대. 영화는 '국가'의 존재 의미와 과거 청산의 필요성에 대한 생각을 전한다. 개인이 대처할 수 없는 문제들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종교 갈등, 인종 갈등, 기후 변화, 첨단 기술의 인간 대체. 정의로운 국가란 실현 가능한 것인가를 묻기 전에 그나마 국가가 없다면 개인은 생존조차 어렵다는 것이 더욱 자명해진다. 아프간과 탈레반을 보라. 애국을 외치는 김상경의 광기어린 표정을 통해 국가의 방향성에 대한 국민의 성찰, 그 필요성을 읽는다. 아. 그러나. 생각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 생각이나마 멈추면 그가 찾아올 것이다. 너는 내 기준에 맞는 애국자냐고 물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