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능 모의고사 감독을 들어간 날이었다. 수학이었다. 담임샘이 좀 쿨하신 분이라 학급 관리가 썩 세밀하지 않고, 거기에 겉도는 아이들이 다른 반에 비해 몇 더 있고 관계들도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편이라 좀 어수선한 반이다. 그래도 2학년이 되니 대학 진학에 대한 막연한 압박 정도는 느끼는지 답안지를 먼저 나눠주고 있는데 이런 질문을 한다. "쌤! 이 모의고사 성적 기록에 남아요?"
"데이터는 당연히 남지만 네가 두려워하는 '생기부 기록'은 되지 않는단다."
내 대답에 안심한 그 아이는 시원하게 답들을 한줄 정렬시키고는 꿀잠으로 빠져든다. 열 여덟 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시기이지만 대입으로 수렴되는 그 길 위해서 한치 앞을 알 수가 없으니 그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압박이 그들을 짓누른다. 단순하게 수치화되는 수능, 내신시험 점수 뿐만 아니라 생활기록부에 기재되는 질적인 관찰 결과들이 분명 입시에 영향을 준다지만 그 작동 과정은 깜깜이니 불안감은 더 커진다. 거기에 각자의 주장을 펴며 장삿속을 내보이는 사교육들이 더 기승을 부린다. 물론, 그 질적 기록(학생들 전원에 대해 기록하도록 교사들에게 강제)이 수업 현장을 바꾸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고무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어른이나 학생이나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앞사람의 꽁무니만 보며 불이 나듯 따라가는 삶을 살게 하는 근원은 아마 '서울 공화국'이라는 말에서 보듯 '중심부에서 밀려나는 것은 곧 죽음'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2
수도권 인구 집중. 치솟는 집값(으로 인한 노동과 급여의 가치 퇴색. 전통적으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말해왔던 노력과 성실함의 가치는 부동산과 주식 거래 앞에서 이제는 그 의미를 잃었다.) 노동과 같이 인간이 어떤 면에서 인간일 수 있는지는 생각하게 하는 가치들이 너무도 빨리 퇴색되고 있다. 한집 건너 한집이 낡은 빈집. 인구 증가는 커녕 고장의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수많은 지자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대도시에서 살던 젊은이에게는 마치 핵전쟁 이후 폐허가 되어버린 광야에서 생존을 시작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업을 구할 수 있는가. 일하는 시간 이외의 다른 시간을 함께 할 사회적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는가. 편리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손쉽게 이용하던 의식주와 문화 서비스를 포기할 수 있는가. 지방 사람들의 텃세를 견뎌낼 수 있는가. 그리고 이 모든 의문과 질문을 견디고 자신의 선택을 유지할 멘탈을 갖추고 있는가.
나 역시도 태어나 자란 부산과, 군생활과 수험생활을 했던 서울에 비하면 시골이랄 수 있는 원주에 7년째 산다. 대도시만큼은 아니더라도 웬만큼 불편함 없이 산다. 물자도 풍부하고 교통도 편하다. 교육 여건도 나쁘지 않다. 그런데, 근무 여건상 곧 이와 비교도 안 되는 시골로 순환근무를 나가야 한다. 그 시골에 가서도 그 동네에서 제일 어린 축에 속하는, 하지만 곧 사회로 나가게 될 학생들을 가르치게 될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한다. 너희가 자라온 이 동네에는 먹을 것이 없으니,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더 나은 삶을 살려면 더 많은 일자리가 있는 도시로 떠나라고 아마도 권하게 될 것이다.
#3
이런 흐름과 정반대의 선택을 한 젊은이가 있다. 지난 8월 말, 상주에 캠핑을 다녀오는 길에 들른 카페 무양주택(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 카페의 주인도 귀농한 젊은 내외인 듯했다.). 지역 예술가들의 그림이나 공예품들을 파는 곳도 한 곳에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 책 <서울아가씨 화이팅> 역시 그 진열대에서 만났다. 표지의 진한 연두색과 잘 어울렸다. 책이 놓여진 짙은 고동색 나무 선반과 함께 마치 한 그루의 나무 같기도 하고 상주라는 마른 나무 가지 끝에 매달린 여린 나뭇잎처럼 새 생명의 증거로 존재하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같다는 생각을 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검색도 되지 않는 이 독립 출판물 한 권의 인세가 얼마나 되겠냐만은, 저자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전해주고 싶어 냉큼 한 권을 집어들었다. 촌으로 내려오려고 먹었던 용기있는 마음과 그곳에서의 생활을 버텨내는 모습에서 또다시 시골살이를 해야 할 나에게도 새로운 생각과 방향성을 찾게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얹어 카드를 내밀었다.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지만, 우선 작가는 완전 귀촌이 아니라 귀농지원사업 프로젝트에 지원해 6개월 간 일하게 되었던 거였다. 일단 할 일(밥벌이)이 당분간 생겼고, 사무실 옆에 숙소도 제공되니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없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체험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서울을 떠나고자 했던 것은 아마 자신의 '쓸모'를 계속 고민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서울은 언제나 내 앞에 누군가 있고 내 뒤에도 항시 대기중이었으므로 굳이 내가 없어도 상관이 없는 세상이다. 그렇지만 우선 사람이 없는 시골에 내려가면 나라는 존재는 아주 특별해진다. 할 줄 아는 것이 없어도, 젊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체 불가의 존재가 된다. 하릴없이 타의적으로 추락하던 자존감을 부여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글쓴이가 하는 일 역시 카페나 서점, 소매업처럼 상대의 호의나 소비욕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지원'해주는 일이었으므로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4
변화된 삶의 모습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우선 먹는 것이 많이 바뀌었다. 푸드 마일리지가 짧은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 밥을 한다. 보존 기한이 짧으니 자연히 자신이 먹을 양에 넘치는 것은 이웃과 공유한다. 식당이 없으니 자신의 끼니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장착된다. (그러나 혼자 만들 수 없음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라떼. 완전히 정착하게 된다면 아마 그때쯤은 커피를 내리고 볶고 라떼를 만드는 기술도 익히게 되겠지.) 차가 없으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고, 이는 강제로 삶의 속도를 늦추고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지게 한다. 삶의 속도가 늦어진다는 것은 빨리 지나쳐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는 일이다. 그 여백은 내 삶의 쓸모와 화두-여유란 무엇인가.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데 쓰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시각각 변화하며 한시도 똑같은 적 없는 상주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언급이 많다. "외롭고 두렵고 불행한 이들을 위한 최고의 치유법은 오직 하늘과 자연과 신만 있는 한적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던 안네 프랑크의 말이 왠지 생각난다.
#5
책에 언급했던 일의 계약기간은 끝난 것 같지만 왠지 아직 글쓴이가 상주에 살고 있을 것만 같아 책 날개에 적힌 인스타그램 주소로 들어가 보았다. 거주지는 옮긴 듯하지만 여전히, 상주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시(市) 정도 되는 곳의 중심가 근처에 살면 웬만한 도시 생활은 된다. 프로젝트가 끝난 뒤 어떤 일을 하며 머물고 있는지는 모른다. 인스타 팔로우는 했지만 직접 묻기는 쑥쓰러웠고, 서점 비슷한 것을 하거나 지역 청년 예술가들과 협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추측할 따름이다. 아마 여전히 상주에서의 삶에 대한 지속성을 계속 고민하고 묻고 연습해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지 않는 도시에서는 새로운 시작도, 그 기회도, 활력도 생기기 어렵다. <지방도시 살생부>라는 책에서는 그래서 아예 대도시권으로 인구와 인프라를 집중시켜 버릴 것을 제안한다. 그건 뭐 너무 큰, 개인이 하기 힘든 일이고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이 청년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을 걸어갈지 계속 지켜보는 것이 내 역할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다다라 있는 그와 내 학생들을 연결시켜 주는 것까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미래를 천천히 탐색해가는 또 하나의 비포장 도로가 놓인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