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배기 아들 녀석과 단 둘이 캠핑을 갔던 날, 애를 재워놓고 혼자 이 영화를 틀었다.
6년을 키웠건만, 내 자식이 아니라 남의 아이를 키워 왔다는 충격적인 사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생물학적 아이를 다시 데려와야 할지, 아니면 나와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동안 키워온 정을 생각해서 살던 대로 살아야 할 것인지 말이다. 주인공은 전자를 선택한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아왔고, 자신의 자녀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부모가 깔아주고 설계해놓은 길 안에서만 자식이 살아가길 바라지만, 전혀 다른 양육 환경에서 자라온 새 아들은 아무리 피가 섞였다고 한들 그 요구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새 둥지를 벗어나 원래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자 한다. 뜻하지 않은 일들 속에서 주인공은 반항 한 번 한 적 없던 아이하고만 살다가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의 균열을 통해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지, 진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낳은 정, 기른 정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사실 아비에게는 낳은 정이란 건 냉정하게 말해서 없다. 엄마와 함께 만든 정이라면 몰라도. 뱃속에 열 달을 품고, 세상으로 내보낼 때 목숨까지 거는 여자인 엄마와는 애초에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저 애가 크면서 외모와 같이 나와 비슷한 유전 형질이 발현되는 걸 확인하는 즐거움은 그저 인생의 덤일 뿐이다.
<당신은 참 괜찮은 부모입니다>의 저자 이근후 박사는 90세 쯤 되어보니 남는 거라곤 유전자, 타고난 기질 그리고 어릴 적 부모에게 배운 것들 뿐이라고 말했다. 어릴 적 부모에게 배운 것.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것. 그런 생각에서 보자면 주인공이 진짜 아빠일 수 있는 아이는 내 유전자를 받은 아이라기보다는 지난 6년 동안 밤잠 설쳐가며 내 자식으로 생각하며 기른 아이인 셈이다.
글자쓰기, 셈하기, 피아노 치기 같은 걸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 위험에서 지켜주고, 함께 걷고, 손을 잡고, 뺨을 부비는 시간들이 나를 아버지로 만들고 너를 내 자식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 양자는 세상에서 딱 서로만이 들어맞는 퍼즐 조각이 되고, 함께 했던 시간들은 세상을 살다가 주저앉고 싶을 때 다시 무릎에 힘을 줄 수 있는 영양제이면서 다시 돌아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된다.
내 아버지의 홀로 된 삶이 더 서글퍼 보이는 것-본인이 그렇게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그것과는 별개로-은, 그런 시간을 별로 보내지 못했기에 아들인 나와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자리가 크지 않다는 것에서 온다. 그래서 어쩌다가 한번씩 만나면 서로에 대한 이야기보다 멈추지 않는 코로나에 대해, TV에 나오는 연예인에 대해, 답도 없는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따름이다. 지금이라도 함께 이야깃거리가 될 법한 일들을 쌓아갈 수도 있겠지만(30대 중반에 60대 후반의 아버지와 단둘이 소극장에 연극을 보러 간 적이 있는가!) 나는 이제 아이가 아니고 아버지 역시 새로 아버지 노릇에 임하기에는 삶에 충분히 지쳤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아버지가 될 기회도 시간도 남았다. 세상에, 오직 내가 아니면 절대 안 되는 일이 어디에 있는지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