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기 전, 유튜브에 이 영화의 제목을 쳐 보니, 1961년에 개봉한 원작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이제 노장의 반열에 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평생 소원이 요런 뮤지컬 영화를 연출하는 거였다는 인터뷰를 본 터라 사전 정보수집 따위 내려놓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영화를 즐겨보기로 했다. 한이불을 덮고 사는 분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중에도 결말이 궁금하면 스마트폰으로 바로 검색을 하시는 분인 걸 떠올리며 참 다르다고 혼자 웃었다.
실제 설정은 어떤지 모르지만 일단 영화는 20세기 초반의 미국 서부를 무대로 하고 있는 듯하다. 모처럼 스마트폰, 자동차, 컴퓨터가 없는 아날로그적인 화면 구성이 좋았다. 그런 기계들 대신 사람들의 춤과 노래, 화려한 색감이 채우는 화면. 등장인물들 역시 그야말로 '영화 주인공'처럼 끝내주게 멋있거나 눈부시게 예쁘지 않다. 오히려 진짜 폴란드(남자 주인공 토니), 푸에르토리코(여자 주인공 마리아) 이민자처럼 생겼다. 다른 배우들도 요즘 사람들처럼 매끈하지 않고 어딘가 결핍되었지만 펄펄 뛰는 생명력이 잘 느껴지는 얼굴들이었다. 아마도, 스필버그 감독의 초점이 마치 당시 시대상의 '재현'에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뮤지컬 영화답게 플롯은 단순하고 인물들의 행동도 막무가내에 가깝다. 미국 빈민가의 미국인 폭력조직 제트파(이라기엔 너무나도 순진한 소년들 같지만)과 푸에르토리코 이민자 조직 샤크파의 투쟁 가운데 처음 만난 토니(미국 쪽)와 마리아(길다. 남미 쪽)가 한 눈에 사랑에 빠지고, 끝없이 서로를 증오하는 두 갱단은 마치 불나방처럼 별 생각 없이 앞뒤 안재고 서로에게 달려든다. 폭력조직이면서도 합법적 사업을 통해 이권을 챙기는 얄미운 현대의 눈으로 보면 지나치게 낭만적(?)이라 오히려 극에 몰입이 안 된다. 사람들이 지금보다 덜 영악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더 솔직하고 소박했던 시절이어서 그런가보다 한다. 2022년의 눈으로 구한말이나 6, 70년대 사람들을 보면 무척이나 어리숙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나만 썩었어......?)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와 정서를 더 폭발력있고 애절하게 증폭시켜 줄 매력적인 뮤지컬 넘버가 부재한다는 게 이 영화가 뮤지컬 영화로서의 매력이 떨어지는 이유다.
아는 게 병인 건지, 뭐 눈엔 뭐만 보이는 건지, 앞서 말했듯 너무 어려보이고 아마추어같은 제트파 아이들(?)을 보면서 '저 아이들은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를 계속 곱씹었다. 제트파와 샤크파의 최종 결전을 앞두고 예비 검속 차원에서 경찰서에 잡혀 온 제트파 아이들의 노래를 통해 이유의 일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제트파나 샤크파나 둘 다 사회 하층민들이지만 샤크파 사람들은 그래도 직업이 있다. 자신들의 고국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나온 실행력 있는 사람들이다. 제트파 역시 그들의 잠식에 맞서 자신들의 원래 구역을 지키겠다는 명분은 있지만 그 구역 확보가 자신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인 것 같지는 않다. 단지 그 구역이라도 없으면 자신들이 그렇게 몰려 다니는 의미가 아예 없어지므로, 존재의 의의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랄까.
아무튼 이들의 부모, 그러니까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 어머니는 마약 중독'이라는 노랫말에서 그들의 가정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경찰들 역시 '너희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백인 빈민층'이라며 그들의 현재 뿐 아니라 미래, 다음 세대까지도 경멸한다. 아이들 스스로도 자신의 미래에 대한 희망도 청사진도 없다. 자연히, 아무런 생각 없이 우루루 몰려다니고 싸움질하고, 분위기 타서 집단 강간도 서슴지 않을 판이다. 친구가 칼에 찔려 쓰러졌는데도(우리나라 조폭 영화에서처럼 나 잡아가시오~ 하고 양 팔목을 내미는 가오도 없이) 불 켜진 방의 바퀴벌레처럼 어둠 속으로 각자 도망가는 모습은 영락없는 고등학교 일진 녀석들로만 보인다. 두렵다는 건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이고, 아무 생각이 없어 보여도 결국 자신의 삶이 아깝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아이들에게, 누군가 너희들의 삶이 소중하다는 걸, 충분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꾸준히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아, 그럼 이 영화의 비극적 로맨스는 존재하지 못했겠지만.
그들의 개인적 삶에서 조금만 시선을 넓혀 보자. 샤크파나, 제트파나, 사회 하층민인 건 똑같다. 제트파는 변변한 직업이 없고 샤크파는 직업이 있지만 대부분 허드렛일이다. 게다가 이민자 정책의 변화에 따라 언제 추방될지 모르는 불안한 신세다. 의료 혜택은 개뿔,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면 그냥 쫓겨나고, 학교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사회에서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하고 아등바등 살아남기 위한 삶을 살고 있는 똑같은 을(乙)들이다. 동병상련, 홀아비 마음은 과부가 안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처지는 서로가 가장 잘 알텐데 이 자식들은 서로 위로, 연대하기는 커녕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증오하며 산다. 자신들의 인권을,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교묘하게 박탈하고 있는 사회 제도, 주정부에 분노를 쏟지 않고 당장 내 눈앞에 있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분노를 쏟아 내는 것이다.
사람은 보는 대로, 받는 만큼 큰다. 그 모든 것이 부모만의 몫은 아닐지라도 부모에게만 맡겨놓는 것은 옳지 않다. 사회가 수많은 을들에게 제도와 법의 이름으로 다정해야 한다. 그들이 홀로 서서 자신의 삶을 주체로서 바라보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 허술한 틈을 메우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람의 마음, 다정함, 연민, 사랑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하고 두 남녀의 사랑에 갇혀버린 미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그래서 감동보다는 허탈함이, 애절함보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