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야구의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드라마 <마지막 승부>와 농구대잔치의 열기, NBA의 유행에도 제법 민감한 국딩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농구를 사랑하게 된 시작은 만화책 <슬램덩크>였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는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친구집에서 본 그 만화에 홀딱 빠졌었다. 특히, 한때 중학교 MVP였지만 부상 이후 농구도 인생도 포기하고 되는대로 살던 정대만에게 완전히 꽂혔다. 선생님 덕분에 코트로 돌아왔어도 놀았던 시절 때문에 체력은 늘 부족하지만 손에 걸리면 여지없이 들어가는 3점슛. 그래서 별명은 불꽃남자. 직관적으로 멋있기도 했지만, 비록 한때 실수를 했더라도 다시 자신의 삶을 불태울 무언가를 찾으면 얼마든지 멋진 남자가 될 수 있다는 그 모습과 함께 나는 사춘기를 맞이했던 것 같다. 백 번이나 여학생들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싸움쟁이 강백호, 평소엔 좀 모자라고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있는 듯 보이지만 농구에만큼은 진심인 신입생 에이스 서태웅 등등 다 잘하진 못해도 특출난 거 하나만 있으면 충분히 사회에서 경쟁력이 있을 수 있다는 나이에 비해 조금 이른 깨달음도 얻었던 것 같다.
정대만의 그 슛폼은 그렇게나 멋졌다. 발목-무릎-허리-어깨-팔꿈치로 이어지는 유려한 점프 끝에 채찍처럼 긁는 손목의 스냅. 손끝을 떠난 공이 림에 닿지 않고 그물을 통과할 때 내는 '촥!'하는 짜릿한 소리. 몇 년이 지나서야 그게 NBA 스타 존 스탁스의 폼을 그대로 그린 것이란 걸 알았다. 당시 내가 살던 섬에는 바닥에 녹색 우레탄 코트가 깔린 곳은 단 두 곳 뿐이었다. 섬의 반대편에 있는 중학교에 한 곳, 섬의 산 꼭대기 쯤에 자리잡은 대학교에 한 곳이 있었다. 중학생이던 당시엔 다른 중학교 코트에 농구공을 튕기며 들어가는 건 굉장한 깡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들을 압도할 실력이 없는데 거기 진입했다가 그동네 애들한테 심히 쳐맞거나 까일 걸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름 큰맘 먹고 대학교 코트엘 갔는데 거긴 또 대학생 형들에게 치여서 공을 던져볼 수조차 없었다. 결국, 대학생 형들도 집에 가고 난 다음 별이 뜨고서야 코트를 쓸 수 있었다.
그 시간에 간 것이 아까워서 매일같이 300개에서 500개쯤 슛을 던졌다. 앞에 마크맨이 없으면 성공률이 꽤 높았다. 실전 게임에서도-시골임을 감안해도- 제대로 된 풀업 점퍼 그러니까 제자리 점프슛을 그럴듯하게 쏘는 건 또래 중 나 하나였다. 길을 걷다가도 공이 없어도 눈을 감고 그 슛폼을 쉐도우로 따라했다. 덕분에 언제나 성공률과는 별개로 슛폼 하나만은 끝내준다는 말을 늘 들었다. 손끝에 감이 좋은 날은 제자리에서 터지는 중거리슛 덕분에 쉽사리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다. 물론, 달리기가 늦어서 당시 유행하던 스타크래프트의 유닛 이름을 따서 시즈탱크라고 놀림 아닌 놀림을 당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 학군단에 입단한 첫해가 되었다. 지금에서야 우습지만 23세인 4학년들이 본인들도 군대에 가보지 않았으면서 고작 한 살 어린 22세 3학년들을 그렇게나 갈구고 군기를 잡았던지. 평소엔 찍소리도 못하던 우리지만, 소대체전 그러니까 학군단 내 자체 체육대회날 만큼은 경기의 형식을 빌려 선배들을 이겨먹어볼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학군단 농구부에 들어갔던 나는 총 4개 팀으로 나눠진 토너먼트 첫 경기에서 선배들 팀을 상대하게 되었다. 여전히 기억난다. 몸을 풀며 연습을 하는데 '어? 오늘은 왠지 슛이 빗나갈 것 같지가 않은데?'하는 느낌이 들었다. 시합이 시작되고 가볍게 던진 3점 슛이 림을 갈랐다. 받으면 넣고, 받으면 넣고 하다보니 그날 시합은 일찌감치 결정이 났다. 내가 넣은 득점이 40점 가까이였다. 선배들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심지어 나를 마크하던 선배가 백코트를 하면서 쌍욕을 했다. 적당히 하라고 X발놈아. 대답은 잘 했다. 일부러 심판을 보던 훈육관님도 보라고 경기를 하다 말고 제 자리에 서서 "네 선배님 알겠습니다!" 하고. 하지만 허리를 90도로 세우고 무릎에 손을 올리고 스탠드에 앉아 경기를 보는 우리 동기들의 주먹에 승리의 환희를 느끼는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 똑똑히 느꼈다. 한골 한골에 그간 우리가 당했던 압제와 수모가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고. 그렇게 3배가 넘는 스코어차로 선배들을 박살낸 우리는 그날 저녁 별 것 아닌 이유로 단체 기합을 받았다. 하지만, 기뻤다.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당신의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나요?'라고 묻는다면 농구에 있어서만큼은 바로 그 순간이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하겠다.
사설이 길었다. <우리가 농구에 미치는 이유>는 미국 오클랜드 고등학교 농구부의 이야기다. 꽤 오랫동안 지역 리그 우승 문턱에서 미끄러지던 팀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한 실화에 기반한 작품이다. 이 책의 작가는 그 학교의 교사이면서 만화가인데, 운동에는 아주 젬병이다. 만화책을 내기 위해 농구부를 취재하고 동행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농구에 빠져드는 자신의 변화 과정을 솔직하게 묘사했다.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이 순수하게 승부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다. NBA와 같은 프로 스포츠가 아니기에 자본에 더렵혀지지 않은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덕에, 독자는 아마 '내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는지'를 돌이켜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