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고 자란 대도시를 떠나 강원도라는 동네에 살게 된 것과, 운 좋게 임용고시에 합격해 교사라는 직업을 구하게 되어서 아마 나는 정말로 억세게 운이 좋게도 중산층의 끝자락에 올라탄 게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다. 중산층이라고 말하기엔 건방지지만 그래도 양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 햇수로 결혼 10년차가 되기까지 부부 명의의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고 각자의 자가용을 굴리고 아이 둘을 키우면서 그렇게 쪼들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부모님들께서 벌이가 없으시고(정확히는 우리 아버지만) 언제 아프셔도 이상하지 않을 연세라는 것만 빼면 특별히 걱정되는 것도 없다. 물론, 유무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살 수 없었겠지만 그런 우주론적인 걸 빼고 내가 벌어서 이렇게 살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는 한다. 지금 흔히들 2030세대니, MZ세대니 하고 일컫는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10년을 약간 넘는 과거엔 뉴스에 이런 보도들이 종종 나왔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월급을 몇 년쯤 모으면 1억이 된다더라, 숨만 쉬고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으면 20년쯤 후에 서울에 아파트를 한 채 마련할 수 있다더라 하는 뉴스말이다. 그런데 이젠 그런 뉴스가 자취를 감추었다. 평범한 직장인이거나, 그들의 월급으로는 수명을 세배 쯤 늘려주지 않는 한 불가능할 정도로 집값이 올라버렸기 때문에 그런 독장수 셈하기조차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덕분에 새아파트 청약에 당첨이 되거나, 주식이 상종가를 쳤거나, 코인 수익률이 대박을 치면 평생 벌어도 못 벌 큰 돈을 단숨에 쥐게 되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성실함, 정직함, 꾸준함 같은 가치들이 반대급부로 급속히 퇴색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말이 이제는 거의 참에 가깝게 거짓 명제라고 판단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만 같다.
의식주 중에 주는 이번 생에 인연이 없고, 의와 식으로 대체를 하려고 하니 세상엔 패스트패션이 범람하고 대중매체는 각종 먹방과 요리로 가득 찼다. 그나마도 지겨우면 피와 살,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자극적인 컨텐츠로 시간을 소비한다. 내 손으로 내 삶의 의식주를 책임지는 게 불가능하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두 가지일 것 같다. 이만하면 됐다고 스스로 그은 선 안에서 만족하는 정신승리와, 아예 이 땅을 떠나는 일이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후자의 대안을 선택한 평범한 한국 여성 '계나'가 호주 시민권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다.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계나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여러가지 역경을 겪어내면서 결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회계일을 보면서 호주에 정착하는 과정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상상에 기반해 썼다기보다는 실제로 호주 이민이나 유학을 다녀온 이들의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상당 부분 얻었다고 하니 그럴 법하다.
작품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허희는 "나는 그녀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확신한다. 뭔가를 성취한 기억으로 조금씩 행복을 느끼는 '자산성 행복'이든, 어떤 순간 짜릿한 행복감을 느끼는 '현금흐름성 행복'이든, 효율성의 잣대로 손익을 계산하는 한 계나는 행복할 수 없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해보이는 행복을 쉽게 느끼기 위해서, 신분이 상승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호주에 간 계나이지만, 그녀가 호주 왕이 되지 않는 이상(호주 왕이 되더라도) 신분 상승을 위한 분투는 이어질 것이고 그녀가 말하는 행복은 언제나 두 발 앞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말일 것이다. 작품 속에서 자본주의라는 사육장 안의 가축으로 비유되는 계나는 사육장을 한국에서 호주로 옮긴 것뿐, 가축이라는 신분에는 변함이 없다.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이에 대해 평론가는 답한다. "톰슨가젤들이랑 사자랑 맞짱뜨자는 게 아니야. 톰슨가젤들이랑 사자랑 연대해서 우리를 부숴버리자는 거지."
이 책은 소설이지 사회과학서적 아니고, 논문도 아니다. 다만 우리를 만들어놓은, 톰슨가젤과 사자를 통제하는 사육장의 주인은 훨씬 똑똑하고 교묘하고 잔인하다는 것이 톰슨가젤과 사자가 손잡는 비현실보다 훨씬 먼저 체감할 현실이라는 게 평론가의 말에 쉽게 빠져들 수 없는 나만의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호하는 책들을 읽다보면 이상하게 저자들이 주장하는 바가 엇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게 그 시절의 유행이었던 건지 아니면 내가 화두로 품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책들이 그런 면에서 읽힌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최근에 읽은 김진명의 소설 <바이러스 x>나 김민섭의 르포르타주 <대리사회> 그리고 이 책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역시 현재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약자들끼리의 동행 혹은 연대라는 키워드를 읽어낸 것이 우연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