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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http://m.ch.yes24.com/Article/View/51290

<채널예스>에서 매주 수요일,
은희경 소설가의 사물에 얽힌 이야기 
'은희경의 물건들'을 연재합니다.



평범하고 간단한 질문인데도 이따금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 

가령 "아침에 일찍 일어나세요?", "운동하세요?", "음식은 뭐 좋아하세요?"와 같은 질문들. 

"글쎄요... 일찍이란 게 언제를 말씀하시는 건지..."

"운동을 늘 하려고는 하는데 규칙적인 건 없어서..." 

"음식은 안 가리지만 맛없는 건 못 견디는 편..." 

"제가 장르는 안 따지고 완성도만 보는 편이라. 앗, 죄송합니다. 그냥 가볍게 물어보셨을 텐데 제가 눈치 없이 신중한 주제에 개그 욕심까지 있어서."


종종 나는 이처럼 정확해지기 위해서 애매함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질문을 받는 즉시 시원스레 대답하는 경우도 있다.

"술 좋아하세요?"

"네, 그럼요!" 


내가 술꾼의 세계에 입문한 것은 30대 중반. 늦깎이의 적극적인 선택이었으니 대답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 나는 올해로 작가가 된 지 27년이 되었고, 술꾼으로서의 이력은 그보다 딱 1년이 많은 28년 차이다. 술꾼을 거쳐서 작가가 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때의 나에게 음주는 일종의 시간제 타락 체험 같은 것이었다. 그 체험장에 입장하면 생활에 시달리고 위축된 나 대신 무책임하고 호탕한 내가 있었다. 취한 눈으로 나를 보니, 소심하고 고지식하다고만 알아온 내가 제법 솔직하고 웃기고 패기조차 있고, 무엇보다 좌절된 꿈을 가슴 깊이 숨긴 채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내 몸속 술꾼의 발견은 내가 기득권 시스템의 압박에서 벗어나 개인성을 각성한 대탈주의 도화선이 된 셈이었다. 나는 이른바 ‘문단의 신데렐라’ 이전에 술꾼계의 ‘대형 신인’이었던 것이다. 

내가 살아온 대로 살지 않고 소설을 쓰겠다며 뒤늦게 반항기에 들어선 데에는 술꾼의 특기인 순정과 터무니없는 낙관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작가가 된 뒤 첫 번째 책의 인세로 샀던 여섯 개 들이 맥주잔 세트가 생각난다. 왜 그것부터 장만했을까. 연년생 아이를 키우느라 외출을 거의 못하던 시절, 친구들이 맥주를 사들고 갑자기 집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급히 쟁반에 잔을 챙기는데, 모여 앉은 사람 수대로 유리잔 다섯 개는 가까스로 갖춰 놓았지만, 짝이 맞는 게 한 벌도 없었다. 크기조차 다 달라서 맥주를 따르니 술의 양도 제각각이었다. 그 술상이 어쩐지 임시변통으로 살아가는 내 삶의 남루한 모습 같아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 연재를 시작할 때 첫 번째 물건은 술잔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 그 때문이다. 몇 년 전 나의 이삿짐 박스를 꾸리던 이사업체 직원이 자신 있게 내뱉은 말이 있다.

“이 집주인은 교수 아니면 술집 하던 사람일 거야.”

그분이 간파했듯이 내 물건 중 가장 많은 것은 책이고 그다음이 술잔이다. 술잔은 술맛과 음주의 양에 관여한다. 음주에 진심인 사람답게 나는 갖가지 술의 종류에 맞는 잔을 구비해놓고 있다. 그중에서 맥주잔이 제일 많다. 

한때는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머그형 맥주잔으로 맥주를 마셨다. 그 잔의 묵직함에는 마치 추수를 끝마친 듯한 풍성하고 흔쾌한 마음, 그리고 ‘자, 어디 한번 시작해 볼까 음하하’라고 외치는 듯한 무장 해제의 호방함이 있다. 600밀리리터 짜리 잔을 가득 채워서 탁자에 올려놓고 호프집의 기분을 내던 시절이었다. 그 뒤에는 실린더처럼 기다랗고 늘씬한 유리잔에 따른 필스너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또 10여 년 전 스페인에 사는 지인을 방문했을 때 냉동실에서 꺼내놓던 차가운 도자기 맥주잔을 빼앗다시피 선물 받아서 그 잔에만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요즘 나의 맥주를 담는 잔은 270밀리미터 우스하리 잔이다. 도쿄의 술집에서 처음 그 잔을 봤을 때는 그 참 쩨쩨한 잔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얇은 유리가 스치듯 입술에 닿는 느낌이 너무 가볍고 산뜻해서, 마치 술이 잔을 거치지 않고 허공에서 입안으로 곧바로 전달되는 느낌이라 당장 반하고 말았다. 우스하리 잔에 술을 따를 때는 브루어리에서 배운 대로 먼저 거품을 수북히 만든 다음 그것이 유지되도록 조심하면서 그 위에 술을 천천히 붓는다. 이제는 술집에서도 누군가 내 잔에 맥주를 따라주면 거품을 사수하기 위해서 절대 잔을 기울이지 않는다. 맥주의 향을 지켜주는 거품. 무거운 것을 덮고 있는 가벼움의 위태로운 매력이라니. 내 술잔이 작고 가벼워진 것은 주량이 줄어서가 아니다. 내가 점점 더 섬세하고 정성스럽게 술을 마시기 때문이다. 

이십 년쯤 전 나는 소설에 이런 문장을 썼다. 

“편의점으로 맥주를 사러 나가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 순간 어떤 이유를 가지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 더없이 약한 짓으로 생각되었다. 술이란 즐거울 때,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때 그냥 마시는 것이다. 슬프거나 괴로울 때 마시면 그것은 술이 아니라 슬픔과 괴로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을 마시는 짓이다.”

그 시절 이런 금과옥조를 써제끼던 사람이 호프집 스타일의 머그잔에 맥주를 콸콸 부어 혼술을 하곤 했다고? 하긴, 소설가란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며 계속 갱신되는 존재일 것이다. 뭔가를 발견하고 깨달아서 소설로 남기지만 쓰고 나면 리셋, 원위치로 돌아가서 다시 탐색을 시작해야만 한다. 새 소설을 쓸 때마다 처음처럼 어려운 것도, 처음처럼 설레는 것도, 그리고 내가 쓴 것을 전혀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도 어쩌면 같은 이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심하자. 거품 아래에 술이 있다. 

다음 이야기는 ‘감자 칼에 손을 베이지 않으려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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