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푸른 운하]는 이승만정권 말기 부정선거를 대항하여 마산에서 시위가 시작해서 4.19혁명으로 세상이 바뀌던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초반에는 시골에서 상경한 은경에게 호감을 느끼는 서울 집에서 알게 된 이치윤, 그의 친구 김남식, 소박한 고향 사람 박지태, 은경을 향한 세 남자의 애정소설로 생각되며, 시대분위기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한가로이 댄스파티를 여는 부유층의 이야기로 가난(서울과 대비되는 농촌은 봄마다 보릿고개를 겪는 시절이다)이 큰 문제가 아닌 시절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부녀지간의 어긋난 사랑이야기로 시작하고,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로 맺는다. 그리고 여러 난관 속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보다 자신이 사랑하고 싶은 남자를 선택하는 은경의 신여성주의를 부각하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야기 정점에 도달할 무렵, 이 세 남자의 목소리를 빌어 한국의 사회교육, 정치경제에 대한 비판을 한다. 당시 30대였던 박경리의 사회인식에 대한 철학과 고뇌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라 생각하니,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 여겨진다. 1960년대 초반에 쓰여진 책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1.사회에 대한 정의감에서 아버지를 내리까고, 친구를 위해서는 애정도 양보하는, 그러면서도 굳이 생색내지 않고 유쾌한 “김남식”, 그는 이승만의 자유당 권력에 기생하여 사업을 하는 김사장의 아들로 사업가 아버지의 뒤를 잇는 대신 오히려 아버지의 인생철학과 정반대의 노선인 굶주린 지성인들의 영합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잡지 <청초>를 출간한다. 이는 사회개혁의 단초가 된다.
또한, 미국 유학을 한 김남식의 입을 빌려 한국의 정치경계를 비판한다.
‘한국의 정치는 이승만의 고루함과 더불어 자본가들의 악덕과 무지스러워 탐욕에 좌우되어오지 않았습니까?
이 정권이 무너지고 안 무너지는 것도 실상 그의 독재성보다 나라 살림을 어떻게 해왔었느냐에 달려 있는 겁니다. 국민들이 최소한 굶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그 골치 아픈 혁명이 필요하겠습니까?
물자가 풍부하고 일거리가 많아짐으로써 소비력이 활발해진다는 것, 그것은 경제학에 있어 ABC죠. 소비자가 없는 자본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국은 가난하고 일거리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본가가 육성되어 왔다는 일조차 실상은 우스꽝스런 일이었어요....’
2.모순과 회의에 몸부림치는 지식인의 고뇌는 “이치윤”의 입을 통하여 전한다.
‘내 자신이 이중인격자만 같애. 영웅심인가 노예근성을, 그 두 개가 내 마음속에 있거든. 철저한 영웅의식을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철저한 노예로 처세하거나, 나는 남식을 대할 때마다 그런 두 갈래 길 위에서 내가 방황하고 있는 것을 느껴.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가난한 농토에서 나가자고 기형적인 교육을 받고 내 과거와 동떨어진 현실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학생 시절에 고학을 했었소... 일에 충실하고 공부에 열중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김 의원을 우연히 알게 되어 줄곧 도움도 받고, 또한 그 분의 비서 노릇을 했었지만 지금에서 나는 아무 지표 없이 걸어온 내 발자취를 돌아다보오. 나는 남식을 잘못 인식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내 결혼상대자도 잘못 인식하였고, 나아가서 현실을 온통 잘못 인식하였소. 그동안 나를 감싸인 모든 환경은 나를 온건하게, 혹은 비겁하게 만들었을 뿐이오....
지금에 와서 내가 어떤 지표를 찾아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닐 거요. 그러나 실행이 문제가 될 것이오. 방 안에서 지표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지요. 어떤 방향을 잡아주는 것도 쉬운 일이오. 지식인들이 항상 우왕좌왕하는 것도 결국은 서재 안의 일본이기 때문에 실제 부딪쳤을 때는 저항력이 없는 법이요....무수한 내 내면과의 모순을 어떻게 처리할까?’
3.은경을 연정했던 “박지태”의 죽음을 알리는 오빠의 편지로 격동의 시기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박지태는 선언 날 밤 난동에 휩쓸려 죽었다... 그의 행동이 정의감에서보다 절망감에서 취해진 것을 나는 잘 안다. 하기란 폭동이란, 혹은 혁명이란 충족된 사람의 정의감에서보다 억압된 인간들의 절망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들의 그들의 죽음 자체는 영웅이라기보다 처참한 발악의 비극인 것이다. 박지태도 그러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개처럼 비참하게 죽어간 것이다. 그는 영웅도 아니요, 우국지사도 아니었다. 그의 젊음이 억압당했던 군대라는, 그리고 현실이라는 형장에서 빠져나오기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결국 현실을 부정하게 된 원이이었던 것이다. 은경아, 불쌍한 지태를 위하여 울어주어라! 불의에 항거한 용맹한 사나이에 대한 눈물이어서는 안 된다. 막다른 골목으로 쫓겨 간 발붙일 수 없는 한국의 무력한 젊은 놈의 말로를 위하여 울어주어라! 개처럼 비천하게 죽어간 젊은 놈!’
은경의 사랑을 갈구하는 세 남자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의 올바른 실현 즉, 국민들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에 대한 고뇌와 실행의 각기 다른 방법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