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가운데 한명으로 있으면서도 베일에 싸여 있는 저자, 엘레나 페란체의 나폴리 4부작을 드디어 읽어 보게 되었다. 저자는 어떤 미디어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서면으로만 인터뷰에 응하고, 이름도 필명이라고 하니 내심 [향수], [좀머씨이야기]의 파트리크 쥐스킨트처럼 우울한 모드이진 않을까 짐작했으나, 예상과 다르게 책 표지는 밝다. 선명한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두 여인이 해변에서 바라보는 분홍빛 노을의 하늘은 푸르르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초등 1학년인 레누(엘레나 그레코)가 제멋대로인 릴라(페르난도 체룰로)와 단짝이 되고 싶어 자신의 인형을 눈앞에서 잃어버리는 아픔과 그것을 찾기 위해 지하창고와 위험천만한 인물(돈 아킬레)의 집을 찾아가는 공모를 감행해야하는 두려움, 그리고 수많은 갈등과 도전, 단짝의 결혼을 지켜보는 복잡한 심경을 세밀하게 들려준다. 1950,60년대 전쟁 후의 이탈리아, 가난으로 학교보다는 일터로 일찍부터 내몰릴 수 밖에 없는 시대라, 릴라는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학을 포기하게 되고, 레누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진학하지만 힘겨움을 토로하는 부모님께 죄책감을 느끼며 공부한다. 그런 간극을 메워가는 이들만의 방법이라도 있는 양 우정이야기는 아리송하면서도 흥미롭게 이어진다.
레누가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는 순간은 종교학 시간의 논쟁이다. 성령의 존재에 대해 성부와 성자를 돋보이게 하는 잉여라는 표현을 쓰는 걸 보면 스스로의 존재감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는 거 같다. 릴라의 시선은 미래에 있는 반면, 레누는 릴라에게 고정되어 있다(표지 그림처럼). 릴라는 레누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톡톡히 한다. 남자아이들이 괴롭히지 못하게 완벽하게 힘을 쓰고, 상급학교를 다니지 못해도 라틴어를 독학으로 터득하고 학교를 다니면서도 쩔쩔매는 레누를 지도하기까지 하는 릴라는 가난의 무게도 능력만 있다면 다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여진다. 늘 당당하고, 도도하고, 똑똑하니까. 자신이 디자인한 구두로 새로운 인생이 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구두제작 기회도, 종교와 사회를 비판하는 지식에서도 점점 멀어져 가고 결국은 재력을 갖춘 남자와의 결혼을 선택하는 릴라의 마지막 두 문장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시대와 사회의 아픔을 말하는 것 같아 슬프다.
"이제 다시는 네가 쓴 글을 읽고 싶지 않아... 나를 아프게 하니까(p.400)"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넌 공부를 계속하도록 해... 넌 내 눈부신 친구잖아. 너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이 까되어야 해(p. 416)"
늘 멋진 선택을 하는 듯한 릴라가 사실은 레누처럼 학교를 다니지 못한 좌절과 공허감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던게다.
이 책은 흡입력이 대단한 거 같다. 개인적으로 낯선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해 외국 소설을 읽을 때는 인물소개란을 다시 펼쳐보기를 수시로 하며 겨우겨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곤 하는데, 이 책은 다음 각각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이름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 쉽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나 보다 싶다가도 어느새 하나의 이야기의 줄기 안에 돌아올 수 있게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스펙타클한 사건은 없다. 그러나 책을 펼치면 섬세한 감정선의 표현들에 금방 감정이입이 되어 주인공과 함께 갈등하고, 안도하고, 조바심내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 단짝과의 추억들도 떠올리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