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노벨문학상 시즌이 되면 어김없이 회자되는 이름. 하지만 정작 그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그 명성 만큼은 못되는 지도 모르겠다.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글은 책 한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것이 처음이니까.
시의 제목이 있고 그 제목 아래 시가 있는 보통의 시집과는 다르다. 제목이 없이 짧막한 시들이 페이지 구분도 없이 계속 이어진다. 짧지만 그 안에 작은 찰나의 인상도 놓치지 않는 시인의 통찰에 감동을 받는다.
“시” 라는 것이 다 그렇지만, 때로는 시인을 붙잡고 이 시를 이런 의미로, 내게 다가왔던 바로 그 의미로 쓰신게 맞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꼈다.
*
오늘도 누구의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무들이 나를 보고 있다.
*
봄비 촉촉 내리는 날
누가 오시나 한두번 내다 보았네
*
누우면 끝장이다.
앓는 짐승이
필사적으로
서 있는 하루
오늘도 이 세상의 그런 하루였단다 숙아
*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넒은 물을 돌아다 보았다.
*
여보 나 왔소
모진 겨울 다 갔소
아내 무덤이 조용히 웃는다
*
딸에게 편지쓰는 손등에
어쩌자고 내려앉느냐
올 봄 첫 손님
노랑나비야
*
흰 구름 널린 하늘 아래
여기저기 바보들 있다
*
저 매미 울음소리
10년 혹은 15년이나
땅속에 있다 나온 울음소리라네
감사하게나
*
두사람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흔하디 흔한 것
동시에
최고의 것
가로되 사랑이더라
*
아기 무덤도
파도소리 들으며 어른이 된다
*
사자자리에서
내가 왔다
궁수자리에서
네가 왔다
우리는 백년 손님 이세상 서성거리다 가자
*
쉼표여
마침표여
내 어설픈 45년
감사합니다
더 이상 그대들을 욕되게 하지 않겠나이다
*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친구를 가져 보아라
적을 안다
적을 가져 보아라
친구를 안다
이 무슨 장난인가
*
답답할 때가 있다
이 세상 밖에 없는가
기껏해야
저 세상 밖에 없는가
*
개는 가난한 제 집에 있다
무슨 대궐
무슨 부자네 기웃거리지 않는다
*
사람들은 이야기함으로써
사람이다
어이 나비 타이 신사!
그래 졸지 말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좀 해보아
*
실컷
태양을 쳐다보다가 소경이 되어버리고 싶은 때가 왜 없겠는가
그대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였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세상을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시궁창 미나리 밭 밭머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
북한 개마고원 상공을 지나갈 때
함께 가는 친구에 죄스러웠다
진실로
내가 탄 비행기가 떨어지기를 빌었다
왜 그랬는지 몰라
그 구름 속 고원이
억세게도 내 저승이었다
<후기>
나도 누구도 매순간의 엄연한 기운과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존재 자체가 미분들의 순간을 이어가는 것 아닌가
그저 눈깜짝할 사이라는 그 순간의 어여쁜 의미가 세상과 맞으리라 여겼다.
이 길을 가는 동안 더러 내려다보는 것도 있고 올려다보는 데도 있으리라.
오늘도
내일도
나는 시의 길을 아득히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