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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마타, 이탈리아

[도서] 페르마타, 이탈리아

이금이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페르마타, 이탈리아. 이금이

이금이 작가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읽고 아동문학을 넘어서 어른 독자를 위한 소설도 이렇게나 잘 쓰시는구나 감탄했다. <허구의 삶>은 양자역학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라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젊은 작가와 같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매번 문학적 성장을 보여주시는 이금이 작가님이 이탈리아 여행 에세이를 출간하셨다. 나는 여행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멋진 곳을 내가 갔다왔지롱~!'하고 자랑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몇 장 읽다가 덮어버리기 일쑤이다. 관광지의 멋진 사진과 찬사가 나에겐 '그림의 떡'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뭔가 달랐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탈리아의 기깔난 풍경이 아니었다. 열악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여행을 즐기려 애쓰는 59세 두 여인의 고군분투, 그리고 여행지에서 회상하는 지나온 삶의 회상이 진짜 주인공이었다.

환갑을 한해 앞두고 이금이 작가는 40년지기 친구 진과 이탈리아 한 달 여행을 다녀오기로 의기투합한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진심 하나도 안 부러웠을 것이다. 공간적 배경만 달라질 뿐 가족 뒤치닥거리하는 건 똑같을 테니까. (여행을 어디로 가느냐 못지 않게 누구랑 가느냐가 정말 중요한 요소이다.) 친구의 눈 건강이 좋지 않아 시작부터 스케줄이 꼬였지만, 두 사람의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여행은 설렘을 안고 시작되었다. 60세의 나도 이렇게 용감하게 떠날 수 있을까.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으로 숙소와 교통편을 예약하고, 스케줄을 짜고, 무거운 캐리어를 끌면서 여행할 수 있을까. 소설가의 필력은 독자를 그 순간 그 곳으로 데려가는 힘이 있다. 어느새 작가님이랑 한 팀이 되어 이탈리아의 이곳저곳을 구경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계획을 잘 짠 여행이라도 돌발상황이 발생하기 마련. 피로가 계속되면 가족 같은 친구 사이도 삐걱거릴 수 있다. 여행의 고비마다 늘 따라붙기 마련인 갈등과 오해, 긴장감과 고단함이 실감나게 쓰여있어서 내 마음이 다 조마조마해졌다. 나는 여행 중에 돌발상황이 오면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거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해서 분위기를 망치곤 하는데, 나이가 주는 연륜이 빛을 발하여 곤란한 상황들을 침착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점이 배울 만했다. 호텔 예약이 잘못되어 비싼 요금을 물게 되었을 때도, 차 렌트에 문제가 생겨 일정을 포기해야 했을 때도, 핸드폰이 방전되어 낙오될 위험에 처했을 때도 후회와 속상함 끝에 깨달음 하나가 남는다. 어찌 보면 시행착오를 많이 겪을수록 남는 게 많은 여행이 아닐까.

대개의 여행 에세이는 지면의 상당 부분을 풍경사진으로 도배하곤 하는데, 이 책은 단 한 장의 사진도 없다. 덕분에 글이 전하는 이미지를 오롯이 상상하는 맛이 있었다. 눈길을 사로잡는 선명한 사진보다 따스한 색감의 일러스트가 여행자의 심리를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예순을 기념한 여행인 만큼 중간중간 작가님이 지나온 삶을 돌아보는 내용이 나온다. 어린 시절과 새댁 시절, 작가 등단기, 전업작가로 어려운 살림 꾸리기 등 인생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가장 감동적인 건 어떤 힘든 순간에도 묵묵히 글을 썼다는 것. IMF로 남편의 사업이 부도나고 남의 손에 넘어간 집에서 <유진과 유진>을 썼다 하니 말 다했다. 작가님의 강단과 끈기에 박수를 보낸다.

페르마타는 '정류장', '잠시 멈춤'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악보의 늘임표를 부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음표나 쉼표에 늘임표 기호가 있으면 본래 박자보다 두세 배 길게 늘여 연주해야 한다. 페르마타라는 단어에 여행의 본질이 담겨있는 것 같다. 잠시 멈추어 평소엔 바쁘다고 밀쳐두었던 것들을 여유 있게 생각하는 것. 실은 평소 일상에서 누리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143)

사춘기에 버금가는 갱년기를 목전에 둔 나는 지금부터 적금을 붓고 여행 파트너를 꼬셔야겠다. 환갑이 되기 전에 작가님처럼 외국 한 달 여행을 꼭 다녀오고 싶다. 작고 어여쁜 이 책이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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