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은
머리에만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가슴에도 새겨집니다.
마음 깊숙이 꽂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입니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 '언어의 온도' 본문 中-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대방과 말을 주고 받는다.
하지만 '말 한 마디 때문에 상처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또는 말을 하고 나서 '아차, 내가 말 실수했네.' 라고 후회한 적은 있는가?'
'나의 사소한 말 한 마디로 인해 우정을 깨진 적은 있는가?'
'친구의 말 한 마디에 위로를 받아본 적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언어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언어는 힘도 가지고 있고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한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저마다 다르다.
온기 있는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줍니다. 세상살이에 지칠 때 어떤 이는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고민을 털어내고, 어떤 이는 책을 읽으며 작가가 건네는 문장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언어에는 감정이 잔뜩 실리기 마련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시원할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정서적 화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돌려 세우긴커녕 꽁꽁
얼어붙게 합니다.
내가 쓰는 언어는 뜨거운 언어일까? 차가운 언어일까?
만약 내가 내뱉은 말 한마디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입었다면, 나의 언어의 온도가 너무 뜨거웠던 것은 아닐까? 내가 한 몇 마디에 누군가 나를 향한 마음을 닫았다면, 나의 언어 온도는 너무 차가웠을지도 모른다. 과거 사소한 말다툼으로 친구와 절교하고 연락을 안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몰랐었다.
내가 한 말이 그 친구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었는지..그 때 당시에는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을 하는 그 친구가 너무 야속하고 서운하고 짜증 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면 생각한다. '혹시나 내가 한 말 한 마디에 그 친구는 나에게 실망하고 나를 향한 마음을 닫아버린 것은 아닐까?' 그럼 나의 언어 온도는 그 친구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으니 차가웠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언어의 온도를 아는 것은 우리의 인간관계 형성에 중요한 것 같다. 자신의 언어의 온도가 너무 뜨겁거나 차갑다면, 그것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마음에 화상을 입히거나, 마음을 얼어붙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나는 나의 언어의 온도를 점검하고 되돌아볼 수 있었다.
다음은 지하철에서 할머니와 손자의 대화이다.
"아직 열이 있네.저녁 먹고 약 먹자."
"네, 그럴께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p.18
만약 이 상황에서 당신이 손자의 할머니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난 어쩌면 "너가 기운이 없어 보이니깐." 또는 "할머니는 딱 보면 알아." 또는 "할머니니깐 다 알지." "나이가 들면 다 자연스럽게 알게 된단다." 등 이런 대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손자의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내가 아파봐야 다른 사람이 아픈 것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진정 느끼게 된다.
살아오면서 그런 마음을 느낀 적이 있었다.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입덫이 너무 심해서 몸무게가 10kg이 빠졌었다. 우리 엄마도 입덫이 심해서 물만 드셨다고 했다. 그땐 그냥 흘려들었는데, 내가 임신하고 입덫으로 아무 것도 못 먹었을 때 알게 되었다. '아, 우리 엄마는 나보다 엄청 힘드셨겠구나.'
그리고 첫째 아이가 아팠을 때, 밤새도록 열이 나서 잠 한숨 못 자고 힘들어하던 때가 있었다. 예전에 엄마가 말한 적이 있다. " 너 아팠을 때는, 너 업고 잠 한숨 못 자다가 서서 잠들었다고.."
그땐 몰랐었다. 내가 겪어보니 우리 엄마가 나보다 더 힘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별의 아픔도 이별을 겪고 나야 진정 알게 된다. 친구가 이별을 해서 힘들어할 때는 몰랐다. 그저 피상적으로 '힘내라, 괜찮아, 잊어버려, 다 시간이 해결해 줄꺼야.' 같은 뻔한 조언만 했었다. 하지만, 내가 이별을 겪으니, 그런 말들은 정말 뻔하고 형식적인 말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이별로 아프고 나니 친구가 그 때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당신은 '환자' 라는 명칭을 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지금까지 아무런 거리낌없이 '환자' 라는 말을 써왔다. 하지만 책에서 이 부분을 읽고 크게 반성하게 되었다.
나이 지긋한 의사가 회진차 병실에 들어왔는데 그는 팔순을 훌쩍 넘긴 환자를 대할 때도 "환자" 혹은 "어르신"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박 원사님" "김 여사님" 하고 인사를 건넸다.
너무 궁금해서 퇴원하는 날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환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으시던데요?"
"그게 궁금하셨어요? 환자에서 환 患이 아플 '환'이잖아요, 자꾸 환자라고 하면 더 아파요."
"아..."
"게다가 '할머니' '할아버지' 같은 호칭 싫어하는 분도 많아요. '그래서 은퇴 전 직함을 불러드리죠. 그러면 병마와 싸우려는 의지를 더 굳게 다지시는 것 같아요. 건강하게 일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바람이 가슴 한쪽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병원에서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의술 醫術 이 될 수도 있어요."
-p.22-
환자를 살리는 것은 의료 기술이나 약이 아니다. 이렇듯 환자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 환자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마음, 진심으로 병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 환자를 위한 따뜻한 말 한마디일 것이다.
사람의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말의 힘과 위력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되도록이면 나도 앞으로 '환자' 나 '할머니' '할아버지' 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다른 호칭으로 부르려고 노력해야겠다.
버스 안에서 일흔 쯤 돼 보이는 어르신이 휴대전화를 만지며 '휴~'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는 모습을 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창밖 풍경과 전화기를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10분 쯤 지났을까. 어른신은 조심스레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우연히 통화 내용을 엿들었는데 시집간 딸에게 전화를 거는 듯했다.
"아비다. 잘 지내? 한 번 걸어봤다...."
-p.32-
왜 이 부분을 읽고 우리 아빠가 생각났는지, 우리 아빠도 전화해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아마 우리 부모님 말고 대개 부모들은 자식과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 오랜 만에 전화를 걸 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오랜 만에 전화를 걸었는데 어떻게 그냥 걸 수 가 있지, 아무런 용건도 없는 걸까,
그게 아니다. 당신의 전화가 자식이 하던 일을, 자식의 일상을 방해할 까 염려스러워, 자식이 미안해 할까봐, "한 번 걸어봤다" 라고 말하시는 것은 아닐까? 그 말 속에는 "안 본지 오래됐구나. 이번 주말에 집에 들러서 얼굴 좀 보자." "보고 싶어서 전화 걸었어." 등 이런 속 뜻이 담겨 있을 지 모른다.
속 마음은 자식을 보고 싶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인데, 당신의 말이 자식에게 부담을 줄까봐, 신경 쓸까봐, 그냥 걸어봤다 라고 가볍게, 아무 의미 없이,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또한 그런 마음을 깊이 깨닫지 못했다. '그냥 걸어봤다'는 말에, '바빠서 나중에 전화 걸겠다.' 라는 식으로 말하며, 당황하며, 미안해 하며 아빠가 전화를 끊으신 적이 있다. 그때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드리지 못한 게 못 내 죄송했다.
'그냥' 이른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p.34-
이제 부터 부모님이 "그냥 한번 걸어봤다." 라고 말하신다면, "저도 보고 싶어요, 조만간 집에 들를께요." 등으로 그 고맙고 그리운 마음을 표현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린 사랑에 이끌리게 되면 황량한 사막에서 야자수라도 발견한 것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다가선다. 그 나무를, 상대방을 알고 싶은 마음에 부리나케 뛰어나간다.
그러나 둘만의 극적인 여행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 서늘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내 발검음은 '네'가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p.43-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게 되면 깨닫게 된다. 처음에는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었지만. 결국에는 '나'를 알 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