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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단수

[도서]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저/홍은주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Welcome to 하루키 월드! '하루키 월드'로 초대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그들 자신도 모르게 그가 만든 '하루키 월드'로 초대를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 월드'에 매혹된다. 부드러운 문체, 생동한 묘사, 개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관, 꿈을 걷는 듯한 섹스, 야구,  재즈와 클래식,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몽환적 분위기,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글의 구성 등, 하루키의 소설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요소이다. 



이번에 출간된  [일인칭 단수] 작품 또한 하루키 월드의 요소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전개되는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하루키의 재즈와 클래식에 대한 기호를 반영한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위드 더 비틀즈'  와 클래식  콘서트에서 만난 여인과의 색다른 만남과 우정을 다룬 '사육제' 가 있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재즈, 클래식, 대중음악 등 대중 문화 요소를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알다시피 하루키는 열혈적인 야구팬이다. 야구에 대한 열정과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이 있다. 마치 꿈을 꾼 듯한 몽환적 분위기의 '크림'  대학교 때 만난 여성과의  꿈을 걷는 듯한 섹스와 만남 이야기를 다룬 '돌베개에', 바에서 만난 여성에 의해  지금까지 알던 세계로부터 유리된 체험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일인칭 단수' 이렇게 여덟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모두 개성이 넘치고 독립적인 이야기 같지만, 이 여덟 편의 이야기의 공통점은 일인칭 단수로써 '나'가 존재하고 '나의 이야기' 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각기 다른 이야기, 독립적인 이야기, 라고 생각이 되지만,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 

즉 이 작품은 하루키 자신의 이야기이고 그가 쓴 에세이이자,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읽어온 하루키 소설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하루키 소설은 어렵다는 편견도 있었다. 왠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다루는 것 같고, 하루키만의 심오한 정신 세계를 다루는 것 같았는데, 오히려 이번 작품은 나도 이해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이야기였고, 그래서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가볍고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하루키 작품을 읽으면서, 항상 두 번 생각해야 했다. 이 문장 속에, 이 글 속에 담긴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등 여러 번 곱씹어서 생각해야 했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아, 다른 참고 문헌을 찾아보며 이해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았고, 그래서 하루키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인 것 같다.


 보통 작가는 소설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 속에 숨어서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한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하루키 자신이 등장인물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 자신의 대학 시절, 자신의 가족 이야기 등 여덟 편의 이야기 곳곳에 하루키의 목소리, 생각,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우리는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p. 169)

어찌 보면 하루키 월드에서 하루키 자신은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은 때로는 악령의 가면이기도 하고 천사의 가면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는 하루키 월드에서 가면을 쓴 채,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피력해왔다. 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 하루키는 그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하루키의 민낯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느낀 그의 민낯은 어렵고 난해하고 작가로서의 모습이 아닌, 인간적이고 평범한 그의 소시민적인 모습이다. 


'돌베개에' 작품 속에서  '나'는 대학교 2학년의 때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자와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던 그녀는 직접 지은 가집을 나중에 보내주었고, ‘는 그중 몇 편을 세월이 지나서까지 가슴속에 품고 있다.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지만, 그녀의 흔적과 기억은 그 가집과 함께 그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열아홉 살 무렵의 나는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거의 알지 못했고, 당연히 타인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도 기쁨이나 슬픔이 뭔지는 대충 알고 있다고 내 딴은 생각했었다. 다만 기쁨과 슬픔 사이에 있는 수많은 현상을, 그것들의 위치관계를 아직 잘 분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종종 나를 몹시 불안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p.9~p.10)

 열아홉 살의 순진하고 어리숙한 대학생의 모습이었던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다. 그 당시 여자에 대해, 여성의 심리에 대해 잘 몰랐던 그가 어쩌다가 여자와 잠자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사랑이란 감정도 없다. 그것은 정말이지 어쩌다 갖게 된 관계였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 (p.15)

"재워줘서 고마워. 고가네이까지 혼자 전철 타고 가기 싫었거든. 정말로."(p.18)


단순히 이런 이유로 그와 그녀는 관계를 맺은 것인가? 정말 아무 이유가 없는 그래서 다시 볼 일도 없는 관계였다. 그런데도 그녀가 주고 간 가집 만큼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간직하고 있다. 

왜 그는 그것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녀를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하루키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이 일을 회상해본다. 그래서 그저 한 때의 추억, 기억으로만 서술하고 있다. 만약 그 가집이 없었다면, 그녀와의 만남도, 관계도 전부 먼지가 되어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두 번 다시는/ 만날 일 없네/ 생각하면서도

못 만날 리없다고 생각하는

 

만나려나그저 이대로/끝나려나

빛에 끌리고그림자에 밟혀                  (p.22)


벤다/ 베인다/돌베개

목덜미 갖다대니/보아라, 먼지가 되었다. (p.25)


'크림' 작품 속에서는 재수생 시절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녔던 여자아이에게서 받은 연주회 초대장과 기이한 노인과의 뜻밖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나'에게 인생에 관련된 뜻밖의 질문을 한다. 

중심이 여러 개, 아니 때로는 무수히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그런 원을 자네는 떠올릴 수 있겠나?" (p.43)

맨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일까? 수학적인 질문인가? 수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나? 그래서 이해가 안 가기도 했다. 수학적으로 이런 원은 있을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곧 이 말의 뜻은 단순한 수학적인 질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치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는가.”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p.44)

어쩌면 그 원도 시간을 쏟고 공을 들이면 떠올릴 수 있을까? 그리고 노인이 말했던 '인생의 크림'이 내 마음 속에 크게 와 닿았다. 크림, 프랑스어로 '크렘 드 라 크렘'이라고 하는 데 그 의미는 '크림 중의 크림,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뜻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 라는 뜻이다. 

노인은 뜻밖의 질문과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마치 꿈을 꾼 듯이. 마치 꿈 속에서 노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것처럼 몽환적 분위기가 연출 된다. 정말 그 노인은 존재하는 것일까? 노인과의 만남은 현실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그 이야기를 읽는 내내 이게 정말 사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여기서 하루키 월드의 몽환적 요소가 잘 드러난다.

작품 속의 열여덟 살이었던 나도 이 노인과의 만남으로 인해  깊은 당혹과 혼란에 빠졌다. 이 작품 속의 나는 하루키 자신일까? 하루키가 열여덟살 때, 그 노인을 만난 것일까? 내 생각에는 그런 것 같다. 그의 이야기에서 진실과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밑을 빠져나갈 때처럼.” (p.49)

그렇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서는 정말 도저히 납득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계속 계속 그 일을 이해하고 내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 곱씹어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봤자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되는 것은 없다. 하루키의 말처럼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놔 두는 지혜도 필요할 지도 모른다.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작품 속에서도 몽환적인 요소가 잘 드러난다. 하루키가 재즈를 좋아한다는 것은 하루키 팬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 월드의 특징이기도 한 재즈, 이 이야기 또한 재즈 이야기이다. 만약에 알토색소폰의 대부 찰리 파커가 요절하지 않고 음악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어땠을까? 재즈 팬이었던 는 이런 발상으로 가상의 음악평을 대학 잡지에 기고한다.  

실제로 찰리 파커는 1955년 3월 12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잡지에 쓴 앨범인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라는 음반은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고 기묘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 몇십 년 후 그와 관련해 실제로 찰리 파커와 기묘한 조우를 하게 된다


버드가 나 하나를 위해 꿈속에서 연주해준 음악은, 나중에 생각해보면 소리의 흐름이라기보다  

오히려 순간적이고 전체적인 조사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영혼 깊숙한 곳의 핵심까지 가닿는 음악이었다는 것이다.듣기 전과 들은 후에 몸의 구조가 조금은 달라진 듯 느껴지는 음악- 그런 음악이 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p.67)


그렇다. 버드는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내 꿈에 찾아온 것이다. 한참 옛날에 내가 그에게 보사노바 음악을 연주할 기회를 제공한 것에 감사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 갖고 있던 악기로 <코르코바도>

연주해주었다. (p.71)

당신은 이 이야기가 믿게 지는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인데, 그는 말한다.

믿는 게 좋다고, 어쨌거나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이다. 


이번에는 음악에 얽힌 여인들과 그들의 운명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위드 더 비틀즈' 작품 속에서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 한 소녀를 회상한다. 고등학교 건물의 어둑한 복도에서 만난 소녀, 그녀는  <위드 더 비틀스> 음반 재킷을 들고 치맛자락을 흔들리며 사라졌다.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에 들어왔고 그녀는 그의 첫사랑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그 당시 1965년은 비틀스의 해였다. 비틀스의 음악은 우리 주위를 구석구석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꼼꼼하게 바른 벽지처럼. 하지만 비틀스 음악은 그에게 팝송이었고 그저 라디오에서나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배경 음악이었다. 재즈나 클래식에 조예가 깊을 정도로 재즈와 클래식을 좋아했지만 팝송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나 보다.

팝송은 그래봐야 그저 팝송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저 요란하게 꾸민 소모품일 뿐일지도 모른다. (p.87)

그리고 만난 첫 여자친구와 그녀의 오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여자친구와 연애를 하지만 결국은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 비틀즈 앨범 재킷을 들고 있던 소녀를 보았을 때 느꼈던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고등학교 시절 복도에서 만난 그 소녀의 환상을 쫓아만 다니느라, 그 여자친구와의 인연을 놓쳐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말하기는 괴롭지만, 결국 그녀는 내 귓 속에 있는 특별한 종을 울려주지는 못했다. 아무리 귀 기울여도, 종소리는 끝까지 들리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그렇지만 내가 도쿄에서 만났던 한 여자는 그 종을 확실히 울려주었다, 그것은 논리나 이론을 따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 혹은 영혼의 깊은 곳에서 멋대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뿐, 개인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종류의 일이다. (p.117)

그와의 인연이 끊어져서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그녀의 오빠는 그 덕분에 병이 치유가 되어 다시 그와 만나게 된다. 끊어진 줄 알았던 인연과 만남이 뜻밖에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육제' 작품 속에서  그는 수많은 클래식 피아노곡 중에서도 슈만의 [사육제]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한 여자와 색다른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녀는 못생겼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나름의 방식으로 역이용하며 즐기기조차 했다. 그녀는 말솜씨가 좋았고, 호감이 갔으며, 화제도 다채로웠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음악 취향도 상당히 괜찮았다. 그렇게 그녀와  부담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반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와 관련해 갑작스러운 소식을 접하고 그녀와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것들은 사사로운 내 인생에서 일어난 한 쌍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보면 약간 길을 돌아간 정도의 에피소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p.181)


그는 이렇듯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한낱 에피소드로 돌린다. 그 일이 있었든, 없었든 간에 그의 인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 일들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일들은 그에게 분명 영향을 끼쳤다. 나뭇잎을 강하게 흔들고, 억새밭을 눕혀 버리고,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가는 바람처럼 그의 인생을 잠시 흔들었던 것이다. 아마 누구나 이런 기억 하나 쯤 있을 것이다.

인생 전체를 보면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바람 한 번 쌩 하고 불다 갈 정도의 그런 기억들 말이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있다. 정말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현실과 비현실을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정말 소설 같은, 영화 같은, 꿈 같은 이야기이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작품 속에서는 온천 마을 료칸에서 사람 말을 하고 나름의 교양을 가진 원숭이가 살고 있다. 어떻게 이런 원숭이가 존재할 수 있지? 작가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작가의 공상인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제일 흥미롭고 재미있기도 했다. 현실에서 이런 원숭이가 실제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이 원숭이는 인간처럼 말도 하지만, 특별한 재능도 있다.

그렇지요. 그것이 적힌 이름을 오랫동안 응시하면서, 정신을 오로지 한 점에 집중하고,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의식 속으로 고스란히 거둬들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신적 육체적 소모도 크지만

일심불란하게 어떻게든 해냅니다. 그렇게 그녀의 일부는 저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하여 저의 갈 곳 없는 연정은 나름대로 무사히 충족되는 셈이지요.” (p.201)

연정을 품은 여자의 이름을 훔치면 그 여자를 가질 수 있다는 발상, 참으로 하루키다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을 훔침으로써, 그 이름의 여자는 자신의 일부를 잃어버리게 된다. 가끔 건망증처럼 자신의 이름을 잠시 잊어버리는 정도의 상실이긴 하다.  

그리고 원숭이는 진정한 사랑과 사랑의 힘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 가를 사랑했다, 연모 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이 됩니다. 만약 그런 열원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그리고 원숭이의 마음도-풀 한 포기 없는 혹한의 황야가 되고 말겠지요. 그 대지에는 온종일 해가 비치지 않고 안녕이라는 풀꽃도, 희망이라는 수목도 자라지 않겠지요. (p.203)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 하루키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그 원숭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뜨거운 탕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에 생긴 망상이었다, 고 정리될 일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는 그저 리얼하고 기묘한 긴 꿈을 꾸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p.205)

 

하루키 월드에 있어서 야구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다. 그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시집' 작품 속에서실제로 야쿠르트 스왈로스 야구팀의 오랜 팬이다. 열광적, 헌신적인 팬까지는 못 되어도 그럭저럭 충실한 팬이라고 할 만하다. 그가 사는 곳이 야구 구장과 가까우냐가 그가 도쿄에서 거처를 구할 때의 중요 포인트가 될 정도이다. 그만큼 그는 야구 구장에 가서 야구를 보는 것을 정말로 좋아한다. 그래서 하루키를 말할 때 그와 야구는 절대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잘하지도 못하는 거의 만년 꼴찌에 가까운 팀을 왜 그렇게 응원하는 것일까? 나 또한 야구 경기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지는 경기를 보면 맥이 빠지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항상 야구 경기가 이길 수 만은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기분이 좋고 힘도 난다. 하지만 그는 거의 매일 지는 경기만 본다. 그는 그 야구 보는 것 자체를 즐긴다. 그리고 그는 그 팀의 야구 경기를 통해 '지는 것의 미학'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오늘도 또 졌네라는 것이 세상의 이치로 여겨지도록 내 몸을 서서히 길들여갔다는 소리다잠수부가 오랫동안 주의깊게, 수압에 몸을 길들이듯이. 그렇다.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하는 데서 나온다. ( p.131)


그리고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도 털어놓는다. 어느 작품 속에서도 털어놓지 못한 그의 가족 이야기를 그는 아버지와 야구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 하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시작한다.

나의 아버지는 불굴의 한신 타이거스 팬이었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그다지 우호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이유는 뭐 여러 가지지만 몸 곳곳으로 전이하는 암과 심각한 당뇨병으로 구십 년에 걸친 인생의 막을 내리기 직전까지, 아버지는 나와 이십 년 넘게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마지막에 가서 소소한 화해 같은 것을 했지만, 그것 역시 화해라 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p.136)

그의 아버지도 그와 마찬가지로 열혈 야구팬이었다. 그래서 그도 야구를 좋아하는 걸까? 서로 다른 팀을 응원해서 부자 사이가 좋아질 기회가 없었을까. 담담하게 아버지와 부자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이십 년 간 느꼈을 그의 아픔과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다. 

그는 야구장 좌석에 앉으면 제일 먼저 흑맥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하지만 흑맥주 판매원은 많지가 않다. 그래서 흑맥주 판매원을 발견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겨우 판매원을 찾아서 손을 흔들면, 판매원은 다가와서  제일 먼저 사과부터 한다고 한다. 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

그러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죄송할 필요 없어요. 전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 판매원을 안심시킨다.

아까부터 흑맥주가 오기를 기다렸거든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흑맥주가 아닌 보통 라거 맥주를 찾기 때문이다.

나도 소설을 쓰면서 그 소년과 똑같은 기분을 맛볼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사과하고 싶어진다.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 라고(p.148)


우리 인생에서 라거 맥주만 있다면 재미없을 것이다. 톡 쏘는 맛의 쓰디쓴 흑맥주도 있어야 인생도 살만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하루키 소설은 우리에게 흑맥주 같은 즐거움을 준다.


 '일인칭 단수' 작품 속에서는 일인칭 단수로 존재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나처럼 내가 아닌 나의 존재 가능성과 삶의 인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치 평상시 입던 옷이 아닌 슈트를 입은 나의 모습이 나 자신 조차 낯설고 위화감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날, 거울 앞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이상하게도 일말의 께름칙함을 머금은 위화감 같은 것이었다. 께름칙함?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그것은 자기 경력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느낄 법한 죄책감과 비슷한지도 모른다. (p.220)

나 조차도 그런 내 모습이 낯설고 불편하다. 그런 나에게 처음 보는 얼굴의 여자가 다가와 말한다.

"멋부리고 혼자 바에 앉아서, 김렛을 마시면서, 과묵하게 독서에 빠져 있으면 재밌나요?"

그리고 그녀는 나의 옷차림에 대해 지적한다. 당신한테는 안 어울리고 분위기에도 맞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렇게 그녀는 나에게 시비를 걸고 공격을 한다. 그러면서 당신이 한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라고 말한다.  "삼 년 전, 어느 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거기서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짓을, 고약한 짓을 했는지, 부끄러운 줄 알아요."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정말 내가 삼 년 전에 그런 짓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 실제의 내가 아닌 내가 그런 짓을 한 것이 밝혀지는 것 또한 두려웠다. 

어쨌든 지극히 불쾌한 어떤 감촉이 입안에 남았다. 삼키려 해도 삼킬 수 없고, 뱉으려 해도 뱉을 수 없는 무언가가. 할 수 있다면 그냥 화를 내고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불쾌한 일을 당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리고 나를 향한 그녀의 처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공정하다고 하기 힘들었으니까어쨌거나 그녀가 말을 걸어올 때까지는 제법 기분좋고 평화로운 봄날의 저녁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화는 나지 않았다. 혼란스러움과 난처함의 파도가 그 외의 감정 혹은 논리를,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어딘가로 떠내려보냈다. (p. 232)

이렇듯 우리 인생에서도, 우리가 기억하지 못했던 인연과 만남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인칭 단수인 한 명의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이렇듯, 실제의 내가 아닌, 내가 모르는 누군 가로 존재할 수도 있다. 일인칭 단수이지만, 동시에 복수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의 삶과 우리의 존재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스쳐 지나가는 인연과 만남, 그들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존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여기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p.224)


실제하는 '나'와 거울 속에 비춰진 나의 모습처럼, 그 모습은 나 자신이 아닌 처음 보는 다른 누군 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습 또한 나인 것을 우리는 안다.


이렇듯 하루키는 이 [일인칭 단수] 라는 작품을 통해 우리 모두는 일인칭 단수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스쳐 지나가는 인연과 만남으로 우리는 또 다른 나로 존재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인연의 고리로 인해 가능하다. 타인과 인연을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한 단계 발전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잘못된 인연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우리는 일인칭 단수인 개별적 존재이지만, 타인과의 인연과 만남에 의해 엮어진 상호의존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나라는 존재는 무수히 많은, 나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인연에 의해 엮여지지만,  정작 나란 존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일인칭 단수로 존재하는 인간의 인연과 운명,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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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마는독서중

    단편인데 모두가 연결되어있는 에세이식..맞나요. 이야 넘 재밌을거 같아요~~~보통 읽던 것과는 다를 듯 합니다. 리뷰 읽으며 잠시 긴장감 흘렀음요. ㅋ

    2020.12.16 16:44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달밤텔러

      그러게요. 저도 각각 따로 독립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모두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루키 소설 어려워서 읽기 힘들어했는데 이번 책은 재미있게 나름 이해하며 열심히 읽은 것 같아요. 엄마는독서중님도 나중에 한번 읽어보세요~^^

      2020.12.16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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