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프랑켄슈타인>을 재독하고 테드 창을 읽을 생각에 자료검색을 하니 이 책이 검색되었다.낯설고 어려운 과학을 교양의 눈높이에 맞춘 터라 흥미롭게 읽었다.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만큼이나 유익한데, 편집이, 다시 말해 전체 구성과 흐름이 연결성이 없어 좀 아쉽다. 전문영역을 대중 독자의 관심에 맞춰 말하는 것에는 높은 점수를 주지만 반대로 전공심화과정(층)이 얇아지고 약해지는 건 안타깝다. 스스로 알아보고 파고드는 공부보다는 누군가 포인트를 잡아 먹여주는 학습에 길들여지는 것 같아서다. 언제부턴가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학문과 지식은 폐쇄적이고 무익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아예 안 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정보가 흔하고 접할 기회가 용이하다 보니 어떤 갈망이나 호기심이 줄어드는 것 같다.
유독 소설에 ‘미친 과학자’의 이미지가 많은 데에는 갑작스런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한 두려움이 투영된 것이면서 동시에 과학을 다루는 사람의 책임 있는 윤리의식과 성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에 동의한다.
사실 과학자에 대한 신격화를 문제시하는 부분에서 굳이 많은 사례 중 몇 안 되는 여성 과학자를 언급해야 했는지 납득이 잘 가지 않았다. 딸이 기록한 전기에는 딸의 ‘문학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퀴리 부인의 실상이 폭로되는 대신 여신화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어디 이런 문제가 그만의 경우겠는가 싶은 것이다. 저자의 설명을 들으며 오히려 남자 파트너가 같은 분야에 종사하지 않을 때는 빛을 보기 힘들고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사정이 더 안타까웠다. 미망인인 퀴리 부인이 유부남 제자와 바람이 나고 남편과 사별 후 감정 격발이 잦고 따뜻한 엄마가 아니었던 것이 다른 점보다 우선적으로 다뤄져야 하는지 불만이 일었다. 물론 저자가 과학자도 영혼과 육체를 가진 인간임을 강조하고자 빗댄 점은 잘 안다.저자의 생각을 전개함에 있어 여성주의적 시각과 젠더 감수성이 고려되었더라면 더 열린 글이 되었을 것 같다.
그의 논지 중에 차이를 내세워 위계와 경계를 짓는 과학(사)은 ‘사이비 과학’이라는 정의가 크게 와닿았다. ‘신중한 과학’은 “‘인종의 자연적 차이, 인간성과 지능의 유전적 차이, 고정된 성차에 대해서 회의적이다(117).” 그리고 다른 나라와 달리 4차산업혁명을 남용하며 교육 시장화하는 강박 현상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인력으로 지탱해온 국력인지라 대량해고의 바람이 두렵고, 경쟁하지 않으면 이미 불안한 사회로 옮아간 뒤이다.
저자가 유토피아 소설과 디스토피아 소설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전자는 예전부터 있었고 후자는 근래에 쓰인 장르라는 사실에 놀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으로 미국에서 조지 오웰의 <1984>가 다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는 언급에 우리 사회의 가짜뉴스와 이상한 당파 논리가 떠올랐다. 진리부의 역사 조작과 당의 전체 슬로건, 그리고 집단행동으로 내보는 행태가 어딘가 익숙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은 생각하고 사랑할 시간과 역사의식과 언어감각을 박탈하기 위해 유해한 사람들이 내지르는 무식함과 옹졸함이다.
우리는 생각을 해야 하고, 지금껏 어떤 길을 밟아서 여기에 왔는지, 즉 우리의 과거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그래야 내가 누군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내가 속한 세상이 미래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186).
인간의 감정도 약물로 조절 가능한 시대이다.인간의 존엄과 선택권이 유전학과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뒷전으로 밀려나는 상황이기도 하다. 스마트폰과 연결되지 않고는 세상과 차단된 듯해 영 불안하다.인간은 자연스레 사이보그화되면서 복제인간에 대한 거부반응은 드세고 이해과정도 부족하다. 영미문학을 전공하며 회의주의가 깊어지고 모든 걸 결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어느덧 강했다. 그런데 요즘 읽는 책들에선 저당잡히지 않는 희망과 기쁨만이 온전한 자유라고 말한다. 저자도 우리 운명은 유전자로 결정되지 않기에 유전적 차별은 중단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실천을 하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달라진다(218).” 과학철학자인 그는 인간의 이성과 상상력을 온전히 믿는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며 인간사회를 교란하는 로봇이다. ‘인간친화적’이지 못한 기계에 대한 공포가 지배적이다. 인간사회는 짝짓기와 자식 번창을 중심으로 이어져왔다. 서로 협력하고 공감하며, 사랑, 명예, 우정, 행복 같은 인간적 ‘가치’를 중시한다.이 때도 인간과 동물, 인간과 로봇이라는 상하질서가 밑바탕에 깔려있다. 하지만 인간은 코스모스 우주를 놓고 봤을 때 ‘푸른 구슬’ 지구에 사는 작은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과 인문학이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이 사실(과학)이나 가치(인문학)로 분명하게 쪼개지지도 않거니와 한쪽에만 의존해선 똑바로 세상을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인간 세상에는 완전히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문제는 거의 없고, 차이를 이해해야 하거나, 혹은 조금 더 옳고 덜 옳은 정도만 가릴 수 있는 문제투성이기 때문이다(318).”
저자의 말대로 과학은 예술을 머금고 교유한다. 언젠가 나올 법칙과 이론을 먼저 발견한 게 아니라 머릿속으로 ‘공간’을 만들어 ‘조건’을 찾아낸 것이다. 과학은 이전에 없던 것을 발명하는 창의적인 활동인 것이다.그의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이 일으킨 사실과 가치 변혁에 대한 설명 때문인지 최근에 읽은 단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낭만적 허영이 아닌 신비로운 현상(풍경)으로 달리 보인다. 다른 무엇과의 접촉으로 인해 서로를 당기며 형성하는 빛을 음미하면서 물질에 드리운 빛의 형체를 가늠할뿐더러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멀어졌던 그것이 있어 실상은 삶의 균형이 가능했음을 빛의 소멸로 비로소 알게 되는, 한 여인의 암흑물질인 우주가 시야를 덮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