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 고학력, 전문직 중산층, 이성애자, 금수저 여성이 대표하는) <발전주의> 세계관에서는 그 어떤 사회적 약자도, 사회 정의도 “나중에”다... 낙관과 연대는 희망사항, 당위일 뿐이고 그런 언어는 우리를 진전시키지 못한다. (45-46)
(여성주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보수적, 방어적이 되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그러니 혐오 발화나 횡설수설 밖에는 할 말이 없고, 젠더를 주제로 한 논의는 거의 불가능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의 <인식론적 곤경>을 ‘가스등 효과’라고 명명했다. (47-48; 60-61)
“그러니까 (반복적) 항의기간이 길어지면 저쪽은 짜증나고 이쪽은 초라하고 비참한 거야... 페미니즘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장춘익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당하지 않고 살려면, 혹은 당한 이유라도 알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은 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정신>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작동하도록 뇌의 방향을 수시로 회전시켜야 한다. (56; 60)
남성 사회, 젠더 법칙, 출세, 인간관계의 논리, 진짜 돈 버는 방법 등 <공적 영역이 작동하는 원리>를 모른다... 지와 무지의 경계는 <권력이 정한다>... 권력이 있는 모든 곳에는 <비밀을 둘러싼 정치>가 있다. 비밀, 고통, 권력이 삼각형을 이룬다. 비밀로 인해 이익을 보는 자, 억압을 당하는 자, 손해를 보는 자, 고문을 당하는 자... 비밀(언어, 사실, 정보, 역사...)은 권력관계의 정점이다. (57; 59)
트라우마의 생존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자기 분열>이다... 고통받은 개인의 경험과 사회의 대화가 가능한 지점은 흐릿하고 아슬아슬하다... (외롭고 서럽지만)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삶에서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믿을 수 없을 때다. (62)
넉넉하고 아쉬움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며 사랑받고 아프지 않은 상태. 어떤 부정의에도 분노하지 않는 우아한 세계. 불일치와의 투쟁이 필요 없는 삶... ‘정신이 안정되고 멀쩡한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속이는 <기득권자들>이다...
부분적이지만 각자 독창적이며 그래서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온전히 하나holism인 대화의 공동체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쉽게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내가 쓴 글이 나를 만드는 과정을 넘어 내가 내 글로 <재귀>함으로써 새로운 내가 탄생하기를 희망한다. (63-65)
보이지 않는 문제, 보지 않으려는 문제, 왜 어떤 문제는 드러나고 어떤 문제는 덮이는가. 왜 어떤 문제는 문제로도 상정되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을 누가 정하는가? 차이와 배제, 범주를 둘러싼 <권력과 지식>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지식은 공부하고 조사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이 지식을 드러나게 하므로 지식은 발명making되는 것이다. (65-65; 67)
피해자의 신분이나 언론의 관심도에 따라 사회적 자원(수사)이 다르게 <분배>되는 현실... <안전>이라는 사회적 공공재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권력,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다...
<인간의 범주>는 사회가 정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척도를 알 수 있다. 생명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람들, 인간으로 합의되지 않는 이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국외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전체의 동등한 일부, 보편자라고 생각한다. ‘불행은 남의 일이다. 나에게 일어날 리 없다. 국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희망이 없다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70; 78-80)
한국은 문제가 생기면, 은폐(그것도 대충), 책임자의 거짓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림, 여론이 조용해질 때까지 방관, 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치기, 피해자 고립을 대책으로 삼는 나라다. <진상 규명을 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를 고사시키고 문제를 떠넘긴다. 통치 세력은 이 문제에 관한 한 대단히 발전된 메커니즘과 언어를 갖고 있다...
‘필요악’(은)... 인식과 문법 면에서 모두 틀린 표현인데, 사회는 이 말을 좋아한다. 불의와 불편들을 손쉽게 설명해주기(덮기) 때문이다... 악은 악일뿐이다. 사회 문화적으로 제도화하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필요한 악’은 없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런 속임수(안전한~ 해산물 먹방)조차 쓰지 않는다. 모두가 슬퍼하는 것보다 “산 사람이라도 살자”고 주장한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혹은 다수가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다>. (74-80)
이미 많이 겪었지만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위협감, 공포감, 그리고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늘 느끼는 외로움과 서러움... 이 사진(오바마 외 흑인 교수와 백인 경찰의 맥주 회동)은 정의란 올바름이 아니라 <여론과 문화 권력>임을, ‘흑인 대통령 시대’의 미국 사회(의).. <현재성>을 집약한다. (93-94)
사회적 약자는 전통적인 의미의 자원이 없다. 돈, 무기, 미디어, 약자의 욕망까지도 <권력자의 것>이다. 그들은 지식인도 ‘가지고 있다.’ ... 사회적 약자의 유일한 자원은 그들의 관점, 언어뿐이(기에 갖기 힘들어도 힘을 보태야 한)다...
투명한 인지 가능한 ‘당사자’와 사회적 실천으로서 ‘당사자성’은 다른 개념이다. 지배 세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히 <당사자성>이다. (96-97; 99)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에서 ‘your’는 나(흑인)는 당신(백인)이라는 주체one가 규정한 타자the others가 아니라는 뜻이다. 흑인은 흑인이지 백인과의 관계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 아니다”가 아니라 “나는 흑인일 뿐이다”라고 말(번역)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백인 사회의 신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누가 인간이고 그것은 <누가 결정하는가>(성원권을 쥔 자)를 되묻는 일이다. (100)
인간과 인권의 개념은 선제하거나 당위적인 것이 아니라 <맥락적이다>... 상황이 발생한 맥락을 논의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101)
미국은 이이제이(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침; 소수인종들의 갈등 서열)로, <국민의 분열>로 유지되는 국가다... 타자끼리의 연대는 어느 사회나 쉽지 않다. 대개 그들은 고통을 경쟁한다. 누가 더 중심과 가까운가. 누가 더 주류와 가까운가... 타자의 지위가 결정되는 사회인 것이다...
어느 시대나 저항의 지도자는 적이 아니라 <내부 분열이나 열렬한 지지자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일이다. 흑인도, 여성도, 그 어떤 정체성의 내부도 <균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저항은 <일시적인 내부의 통일 전선>일 뿐이다. 흑인도, 여성도 내부에 같은 인간은 없다. (104-105; 108)
지배자의 무지...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