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은 1장보다 굵은 심지가 덜 박힌 것 같으나, 사랑과 매체 미디어를 다룰 때 특유의 현장성의 언어로 곳곳에서 정체 구간이 생긴다. 반가운 포즈다. 앞과 마찬가지로 주요문장을 공유하고 < >로 개인 강조점을 표시하고 필요시 의견을 간단히 달겠다.
인식자의 위치가 달라짐에 따라 어떤 대상 혹은 세계가 다르게 보이는 경험이 주는 자원, 이것이 <상상력>이다. (113)
누구나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약간 우울한 사회, 고뇌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안정된 삶은 어느 정도 ‘마음의 짐’을 진 채 사는 것이다. 우울, 걱정, 슬픔은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타인과 조화로운 삶은 사는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질병으로서 우울증>은 이와 크게 다르다. (120-121)
==> 이 대목에서 덴마크 전체가 감옥이라던 캐릭터 햄릿이 떠오른다. 영국을 비롯해 유럽은 어느 정도의 우울감이나 심지어 ‘존재하느냐 마느냐’의 기분 장애에 따른 선택 압박을 인간의 조건으로 수용한다. 반면 미국은 명랑하고 쾌활함을 좋은 성격이자 불굴의 정신으로 꼽는다. 그런데 웃긴 게 섭취 장애와 비만과 총기난사 등으로 고통 받는 대표적인 민족이라는 점이다.
<사랑>은 인정, 존중, 호감, 친밀감과 안전감 같은 인간 행동의 긍정적인 부분이자 자원이다.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닌 투쟁과 노력의 영역이다... 이 또한 지성과 용기와 성찰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문제다. 대표적으로 제도화된 사랑인 이성애나 모성에 대한 공부, 자신의 위치, 사회에 대한 이해 같은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124)
사랑은 상대(대상)와의 관계가 아니다.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나의’ 사건이다.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행위,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사랑 자체가 소중해서가 아니라 <사는 의미>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특정한 개인/파트너와의 애정을 추구하는 이들이나 사회적 권력, 돈, 명예를 성취하려는 노력 역시 모두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이다. (125)
사랑의 기반은 <아낌과 존중>이다. 상대에 대한 전적인 수용, 응원과 지지, 기도, 개입하지 않는 바라봄, 상대가 필요한 것을 보이지 않게 행하는 것, 아픈 사람을 살게 하는 마음 씀... 이는 자신의 에고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자신을 비워야 가능한 일... 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인생에서 가장 복잡하고 치열한 일이다. (128-129)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통치자의 운명처럼 팬 없는 스타는 더는 반짝이지 않는다... 내가 스타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다...
스타에 대한 팬의 마음은 여러 가지다. 그냥 좋음, 존경, 선망, 소유욕, 반사회적인 짝사랑... 이 가운데 스타를 숭배함으로써 자기 인생의 스트레스와 낙오자 심리에서 도피하려는 부류가 가장 위험하다...
멸망 직전의 세상에서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서로 돕고 살자는 뜻일 것이다... “끝까지 함께하자”는 팬들의 외침은 생존의 욕구다. 팬덤 그리고 정치는 <공동선>을 의식하는 배려와 사랑의 공동체여야 한다. (130-132)
==> 윤석열은 알까. 나는 민주당 내부 총질에 팬덤 정치는 윤건희이고, 우리는 대중정치라고 우기는 중이다^^. 저자가 문빠의 심각성을 지적할 때 이잼을 시샘하는 무리들이 개딸 타령을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대깨문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여성화-무력화 수작이 더해진 것이다. 두번째 인용은 그렇더라도 건강한 지지와 순기능을 점검할 타이밍이라는 언질을 준다.
이 영화(‘밀리언 달러 베이비’)에는 명장면, 명대사가 넘치는데, 거의 메타포다. 이 영화는 (감독) 이스트우드가 쓴 인생과 고통에 관한 시다... 항상 나 자신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 어떤 부위는 맞으면 피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인생에는 극복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복싱에서 중요한 것은 자세라는 것(을 알린다). (126-127)
==> 영화의 원작은 40년간 여러 일들을 전전하며 69세에 출간된 소설집 ‘불타는 로프’ 중 한편이라고 한다. 문득 한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은 ‘유혹하는 글쓰기’가 생각났다. 스티븐 킹의 ‘On Writing’을 과하게 변조한 면이 있다. 마케팅에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작가의 담백하고 진솔한 이야기, 쓸 수밖에 없는 내밀한 고백을 집어삼켰다고 본다^^.
말하는 행위는 마음의 가시를 돌보는 일과 비슷하다... <말하기(스피치)>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억압하는 문화에서는 자살률이 높다.. 혐오 발화는 말하기citing를 초과하고, 남용하고, 선을 넘어선ex/citable 상황이다. 어떤 사람들은 ‘초과’는커녕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도 못하는데...
어차피 인생에 해결은 없으므로, 그저 들어주며,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걱정을 하지 않는 사람.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안 할 사람. 내 말을 잊어버릴 사람... (이것저것 걸려서)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기도>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아는 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다... 인생에는 ‘안 되는 일’이 천지다.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쓴다...
내 안의 무엇인가--주로 괴로움--를 꺼내놓으면, 짐이 덜어지고 상황도 객관화되고 안정이 된다. 고민, 외로움, 스트레스일수록 말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쓰기도 마찬가지다...
곤경을 겪으며 고립되어 있을 때, 타인과의 연결 자체만으로도 상황이 ‘정리된다.’ 전화를 끊고,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136; 138; 140)
==> 말을 해 감정을 해소 혹은 정화하는 사람이 있고, 글로 풀어 쓰며 생각을 더디게 정리하는 사람도 있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나는 기도하거나 벽보고 말하거나 눌러두었다가 글로 푸는 편이다. 답답한 핸디캡이기도 한데, 내 안에서 괜찮다는 소리가 퍼져 나와야 겨우 괜찮아지는 타입이라 어쩔 수 없다. 십년 이상 안 사람에게는(다행히 다들 듣고 거의 잊는) 간혹 대충은 말한다. 오히려 전혀 관계없는 모르는 사람에게 담백한 위로와 충고를 구하는 쪽이라 공감이 됐다.
<나이>는 다른 사회 구조와 다르게 ‘어려도, 어중간해도, 늙어도’ 맥락에 따라 차별받는다. 그래서 모두가 피해자라고 싸운다...
‘위스키 온 더 락’은 자연의 이치에 대한 좋은 비유다... 얼음(젊음)이 녹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술맛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나이 듦은 그저 “감당 못하는 서늘한 밤의 고독... 혼자서 살아가는 게 두려(운)” 삶의 한 모습일 뿐이다. (145; 147)
==>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조이Joy와 함께 슬픔도 함께 해야 하고, 보랏빛 피어Fear도 빼놓을 수 없다. 인간의 뇌가 담당하는 감정들은 여럿이 공존한다. 심지어 어린 시절 의지했던 친구 빙봉도 사는 동안 기억 속에 소중하게 간직한다.
세상에는 진실도 객관도 사실도 없다. 그것으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시야는 감독이든 관객이든 인식 주체의 온전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자신이 무엇을 ‘못 보았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감 욕망을 경험(하곤 하는데)... 앎의 범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인정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상이 앎이요, 삶이어야 한다. (★148-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