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빅 퀘스천을 던져 결연하다 못해 비장하다. 흔들리는 순간 잡아주는 언어의 강력한 힘을 경험하고 믿기에 이런 요소까지 정희진 다움으로 보게 된다. 누누이 강조해왔듯이 나는 삶-글쓰기-사회의 관계와 연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별히 리베카 솔닛이나 아룬다티 로이의 글을 아끼는 이유도 삼각구도가 탄탄히 서로를 받치기 때문이다. 겉돌거나 따로 놀지 않는 일체감과 질서 부여 감각이 믿음직하다.
저자는 ‘융합 글쓰기’라는 슬로건이 지식의 양이나 축적(‘더하기’의 이미지)으로 둔갑되는 현상을 심각하게 우려한다. 만능통치약 같은 융합과 통섭consilience 개념으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에드워드 윌슨과 최재천을 공격한다. 정 작가에게 융합은 자기 가치관과 위치와 당파성을 발판으로, 이동하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역동이다. 한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작지만 새로운 세계’의 탄생 가능성에 주목하고 응원한다. 삶의 의지를 꺾는 모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더 나은 삶을 설계하도록 안내하는 대체 불가능한 나의 언어를 목표로 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고 떠드는 나열이나 짜깁기와 달리, 발언자의 철학과 비전이 맑게 투영된 언어는 밖으로 내민 손이 된다. 앞에서도 몇 차례 강조했듯이, 정 작가는 어설픈 뒤집기나 전체 맥락이나 역사를 모른 채 과격한 떠듦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대안적 언어>는 ‘내로남불’ 경쟁이나 ‘여혐/남혐’, ‘진보/보수’의 대립counter 구도와 완전히 다른 길을 연다고 첨언한다. ‘전환(trans-) 혹은 의미의 도약’을 이룬 글은 우리가 아는 지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함으로써 공부의 즐거움과 성과를 극대화하는 “실천”이자, 내 생각을 분명히 알고 더 필요한 앎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경계 넘기(rooting and shifting 근간 다진 후 이동)(16)”라고 정의한다.
학업을 마치고도 주춤하는 내게 지도교수님은 배운 지식을 사회에 돌려주지 않음은 이기적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는 약자와 지구에 봉사해야 한다(19)”와 일맥상통할 것 같다. 저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히 쓴 끝에 이전에 ‘아는 것’에서 탈출하는 글은, “잠깐 각성하는 쉬운 ‘부활’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갱생’(19)”에 가깝다고 말한다. 자기 연민에 빠진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trans-former(이전의 것을 초월) 하라고.
다시 말해 저자에게 융합적 글쓰기는 “수직적인 수용이 아니라 기존의 법칙을 파괴하고.. 다른 의미의 생명체를 만드는(21)” 유사 창조행위다. 그런 글이 독자와 소통하며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지식 생산(20)”에 이바지하게 된다.
추신. 가끔 보면 남의 어투와 표현력을 자기 것처럼 도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의 옷 훔쳐 입는 빙의 대신 너답게 말하는 연습을 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