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인가를 제목으로 단 책들이 붐이고, 평생교육이 일반화되는 요즘 중년 이후 관심이 드높다. 김영민의 책은 머리 식힐 겸 읽었고, 고미숙 선생의 공부 시리즈는 꾸준히 따라 읽었다(최근 글에 힘이 빠지셔서*^^*). 김영하 작가의 삼부작 ‘다다다’는 2030 동지들에게 권하고 싶다. 책들이 취하는 주요 포인트와 관점들이 달라 서로 보완하는 효과가 있다. 지금의 나는 정희진 작가의 워딩을 쵝오의 위치에 두고 싶다.
저자의 말은 자꾸 곱씹게 된다. 아침마다 영양제 삼아 챙겨먹는 작고 단단한 사과를 닮았다. 한국은 트럼프라는 ‘증후적 인물’을 남의 나라 이야기로 나태하게 치부한 결과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노골적인 혐오와 불이익을 주는 K-트럼프를 리더로 두고 지낸다. 서민경제나 지역경제에 관심이 일체 없는 대통령은 당선 일 년 만에 ‘고실업’과 ‘노동 의욕 상실’을 예고한다.
지난 일 년 계속된 한탄이 왜 사회적 약자가 특권층을 뽑고 지지gr하느냐 였다. 이론가 파농이 말한 ‘하얀 가면을 쓴’ 흑인의 백인 선망과 추종의 유사 심리를 읽어낼 수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의 욕망 특징이 “절대성, 일방성, 그리고 주체적 종속”인 관계로 “상호 해방의 가능성은 없다(89).” 그들은 재벌의 손에 그들의 생계가 결정된다고 믿는다(2번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이라 하는 나도 편협).
고용과 안전은 뒷전인 재벌가를 선망하고, 무노조 경영과 산업 재해 방치를 방조한다. 저자는 “우리는 착취하는 자의 언어로 말하고 그들을 더 걱정한다(90)”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에서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앞잡이가 되어 아들을 밀고하고 주인집에 바치는 장면은 무지한 끔찍함 그 이상이었다.
저자는 한국이 문맹률은 낮은 반면 문해력은 바닥 수준이라고 개탄한다. 자구적 말 풀이와 해석 능력이 대체로 부족하다고 진단한다. 문해력이 낮은 원인을 ‘분단과 식민주의’(여파)로 꼽는다. 반미, 반북, 친일로 프레임 짓거나 국가보안법과 색깔론이 여전히 작동하는 나라에서 빚어지는 일이다. IT 강국이라는 포장을 뜯어내면 ‘진영 논리’에 휘둘리는 무지가 드러난다. 그런 이유로 국민은 ‘동물농장’의 가축쯤으로 치부된다ㅜㅜ.
문해력은 인간의 조건이자 ‘상식 사회’의 초석이다. 낮은 문해력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고 <지적 양극화>, <의사소통 저해> 등 수많은 문제를 낳는다... 낮은 문해력은 유용한 통치 기반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 사회의 문해력은 일제 강점기, 미군정, 한국 전쟁 때보다 후퇴했다. (94-95)
저자는 문해력이, 지식의 정보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라고 설명한다.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은 에포케(판단 정지)이며, 알아 가는 자기 진화의 ‘과정’으로 연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 작가는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무한한 자유,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유의 시대(99)”라고 예리하게 가른다. 대통령의 69시간 근무제 발언에 ‘실업과 과로사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발이 거세다. 윤 정부가 포용하는 세대가 있기나 한가.
어제 이재명은 호찌민의 싸움 전략을 말하며 서로 믿고 보조를 맞추는 길동무가 되어달라고 지지자들에게 부탁했다. 이런 소통 자리가 리더는 머리를 빌려 쓰는 사람임을 인증한다. “현실 정치 지도자의 첫 번째 조건은 <현명함>이다. 그래야 참모의 능력을 제대로 빌릴 수 있다(101).” 이 대표의 헌신할 만한 조직과 결합된 ‘확장성’이 각종 괴롭힘과 두려움을 떨쳐내게 하는 것 같다. 융합의 측면에선 개별적인 가치관의 충돌을 통한 ‘당파성의 지속적인 재생산’이 중요한데, 그는 이를 꿰뚫어보고 있다. 숭일崇日 지도자의 겁박 쇼, 아니면 거짓 눈물 쇼와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몸의 개별 텍스트성을 특별히 여긴다. 이에 기초해 앎의 내용과 가치관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생성 중인 지식(앎)의 융합 작용을 긍정하게 한다. 알다시피 나는 에머슨과 소로로 대표되는 미국의 초절주의 사상을 흠모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 불가능한 완벽한 개체다(102).” 비록 이미 있던 철학과 가치를 그들 문화(특히 동부)에 녹여 특성화하고 개념화하고 포교한 것이라 해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같은 이유에서 이잼의 정치 스피치를 사랑한다.
2장에서 공부하는 공동체 모임이나 도반 관계를 말하는 부분에 크게 공감했다. 개인 내부에 융합이 된 이들이 모여 ‘함께’ 공부할 때 파급력이 커진다. 그냥 모여서만은 안 된다. ‘동무는 독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 융합은 단순히 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개별적 몸들의 접속 상황이기에 서로 충돌하며 ‘새로운 사유’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자극과 긴장 관계지만 뒤끝 없이 믿을 만한 길동무들은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나 ‘마지막 강의’ 같은 책이 인기를 모았던 이유도 도반을 향한 갈망을 채울 수 있다는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운동을 함께 하는 정신적 단짝들.
모든 분리와 분업은 <위계화>의 시작이다. 그래서 앎의 궁극적 목적은 배제 없는 온전함holism이다. 온전함은 경계, 선입견 없이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유로운 가능성>의 상태를 말한다. 그러려면 일단 우리의 온 몸을 비우는(아마도 뇌 포함^^) 노력, 적어도 상상이라도 자주 해야 한다. (108)
아는 것이 힘이 되어야 함은 맞지만 지식인의 권위 의식에는 반대한다. 이 대목에서 정여울 작가가 한 학교에 귀속되지 못한 사연이 떠오른다. 주변부에 있거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분방함을 더 원할 수도 있다. 사이의 경계인에게만 허락되는 봄과 통찰이 있으니까. 온전함이 wholeness가 아닌 점에도 주목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 wholeness는 착각이자 신기루이자 이상향에 그치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대안으로 holism 제시를 통해 개별들의 접촉을 있는 그대로만 살린다. 꽉 차 있거나 과부하 상태에서는 새로운 것이 들어설 여유 공간이 없다.
개인적으로 이성적 판단과 인간의 감정의 영역에 대해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이런 때 저자의 “이성, 합리성, 일관성은 인간을 정의하고자 특정 시기에 ‘만들어진’ 개념일 뿐(109)”이라는 말에 집중하게 된다.
무리수를 조금 두자면, 인간사는 모두 언어로 맺어지고 확장되거나 흩어진다. 인간과 대척점에 놓이는 AI 같은 첨단 기술도 결국은 ‘언어’(코딩)의 산물이다. 언어를 매개로 융합하는 현장은 대단히 역동적인 활동 모둠이기도 하다. 자신과 세상을 ‘아는 과정’에서 열의의 불이 붙고 그것이 다른 관심사로 옮아가기 때문이다. 강의를 하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다양한 학생들과 영문학을 논할 때였다. 전공의 형식과 권태에 묶이지 않는 교양의 자유로움이 어디까지 학생들을 이동시킬지 종잡을 수 없었다. 같이 충만해졌던 감사한 추억 :)
나는 감화가 컸던 책에 대해 말할 때 유독 작은따옴표를 많이 쓴다. 작은따옴표도 느낌표처럼 큰 언성으로 들릴 수 있어 자제하려는데 잘 안 된다. 이 찔림을 저자가 포근히 감싸준다. “이중 내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작은따옴표 사용을 자제하는 일이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글쓰기, 창의적 글쓰기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작은따옴표는 중요한 문제다. 작은따옴표는 기존의 의미를 재해석했다는 표식 중 가장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유) 표식이다(113).”
잠시 껄끄러운 이야기를 하겠다. 문재인 대통령 집권 당시 개정 강사법이 마침표를 찍고 채택되었다. 물론 이전 보수 정권이 밑밥을 깐 발의안이었지만 최종 승인자는 그로 남을 것이다. 터무니없게도 강사법은 대부분 종사자들의 뜻과는 무관했고, 인문학자를 양성하지 않는 한국사회로 가는 길을 확실히 했다. 박사할 거면 외국 나가든지. 사대주의에 물든 사람들의 결정. 지적 자생력을 포기해버리는 처참한 사태에,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한국은 지적 독립체 양성에 인색하다. “잘사는 나라, 부국강병의 염원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이 사상들은 왠지 기력이 없거나 심지어 한가한 주제로 인식된다(114).” 나는 사상은 idea로 사상가는 thinker로 쓰길 좋아한다. 생활 밀착형 표현을 쓰고 싶다. “지식은 자원을 정의하고 <분배하는 자원> 중의 자원이다(124).” (경제 지상) 발전주의에 맞서기 위해선 사회 운동을 응집시킬 대안 이론이 절실하다. 몸빵만으로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언어와 사고 정립과 재창출도 수반되어야 한다. 확립된 자기 가치관과 관점 위에, 지식을 응용하고 연습하는 언어 마술사(스피커)도 양성해야 맞다.
다음으로 넘어가 김건희 여사는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 거래를 위반한 피의자다. 정황이 확인된 것만 해도 주가조작범이자 논문표절자다. 중세 시대에서나 가능할 초법적인 방탄 거니. 신평 교수는 학계 표절이 ‘관례’인 것처럼 부풀려 말했다. 그가 속한 교육 기관은 그런지 몰라도 나는 대학원 시절 석사 논문 표절이 당사자의 고발로 발각돼 박사 논문까지 자동 취소되는 교육대학원 사례를 똑똑히 보았다. 두 달 만에 내려진 취소 처분이 왜 김건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가. 그와 관련된 다른 주가조작 공범들은 어쩔 건가.
그리고 여성주의 얘기만 나와도 발끈하는 여성분들이 계시다. 원시적일 수 있으나 나는 생물학적으로 여자인 경우 앞 세대들에게 빚진 부분이 누구나 있으며 그들의 노고에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주의다. 특정 사람을 운운하며 여성주의 전체를 깎아내리는 건 터무니없다. 진정 박지현이 여성주의 대표주자라고 생각하는가? 심상정이 노동자와 장애인을 대변하는가? 그냥 사익 추구하는 심술보들 아닌가.
한때는 문학 전도사냐는 말에 파르르 떨던 시절이 있었다. 전공과 직업을 밝히고 싶지 않아 꾹 참았지만 (영)문학 복음 좀 하면 안 되나. 이젠 그리 받아친다. 여성주의에 반감 있는 분들에게 실비아 플라스, 까미유 클로델, 프리다 칼로, 힐러리, 미셸... 한 명이라도 알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실체 없는 부당함에 인생을 걸고 싸우는 사람은 없다. 예술가나 여사라 거리감이 든다면 ‘82년생 김지영’이라도 보시라. 지금의 공부할 자유와 당연한 권리는 그냥 어느 날 생긴 게 아니다. 좀 알고 싫다 해라 요.
자신을 생태주의-여성주의-평화주의가 교차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정희진 작가. 자본이나 폭력에 봉사하는 융합을 경계하고, 증오와 파괴가 아닌 대안적 융합을 그리는 그(의 글)가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