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15글자로 이루어진 한 문장이 여성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여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나의 딸이 거울앞에서 고민하며 보낼 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 진다. 무엇을 하든, 어떤 지위에 있든, 나이가 많든 적든 결국엔 몸으로 환원되는 여성의 삶. 그런 삶을 아이가 경험해야 하는게 두렵다.
여성에게 외모는권력이고 힘이 된다는 말, 누구도 너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말이 싫다. 미용산업이 경제에 미치는 효과 하나만 생각하더라도 여성에게 있어 외모는 결코 개인적 선택의 문제로 취급될 수 없다. '선택'이라는 말은 교묘한 속임 수 일 뿐이다.
1910~1940년대 전시체제 에서는 여성 운동선수들의 강인함이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이미지 였다고 한다. 전쟁에 나간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들의 노동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세상은 다시 수동적 여성의 이미지를 이용해 일터에 있던 수백만 여성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여성노동자의 빈자리는 다시 남성들로 채워졌다. 집으로 돌아간 여성들의 삶은 어떠 했을까..
오늘날 사회가 요구하는 예쁨은 하나하나 늘어놓을 수 없을만큼 다양하고 복잡하다. 미디어와 sns는 끊임없이 여성의 외모에 대해 떠들어댄다.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다. 아이들의 화장은 단순한 놀이가 아닌 문화가 되었고, 유아들까지 뷰티산업의 고객이 되었다.
나는 이런세상이 싫고 불편하다. 내가 경험하고 살아온 것보다 더 많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평가되어질 내 딸의 삶이 벌써부터 나를 두렵게 한다. 외모를 중심으로 억압되었던 내 삶을 아이가 닮을까 불안하다. 화장을하고 예쁜옷을 입으면 마치 나의 본질이 바뀔 수 있을거란
어리석은 생각을 나의 딸도 똑같이 하게될까 겁이난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거짓된 이미지에 속아 자신의 몸을 가치없게 여길까봐,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낼까봐 겁이난다.
물론 이런 두려움은 나의 노력으로 일정부분 상쇄시킬 수 있다. 예를들면 여성의 삶에 관한 책을 읽고 고민하는것, 그리고 아이와 종종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 될 수 있다면 외모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 아이에도 미디어 리터러시 관련된 책을 읽게 하는 것..등등
그러나 매 순간 세상은 너무나 뻔뻔하게 '선택'이라는 단어로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요구하고, 우리중 많은 이들이 이러한 억압을 '자기만족' 이라는 말로 바꿔 내면화 한다. 왜곡된 여성성을 어느정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게된 지금의 나도 '예쁨'이라는 달콤한 말 앞에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평생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거울앞에서 좀더 무던해 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좀더 건강한 사람이 되고싶다. 외모가 아닌 내가 하는 일로,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로 누군가에게 보여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 사는것에 좀더 중점을 두고 싶다. 나는 딸 하나 아들 셋을 키우는 엄마가 아니라 그냥 사람 넷을 키우는 엄마로 그렇게 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