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현실사이
나는 아이를 좋아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아기를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어른의 품에 안겨 있는 작은 아기는 언제나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작은 몸의 움직임이 신기했고, 나를 보는 아기의 반짝이는 눈이 좋았다. 나중에 커서 결혼을 하면 꼭 아이를 많이 낳겠다고 생각 했다. 그리고 이 철 없는 꿈을 나는 진짜 이루고 말았다. 행복했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이루어 졌고, 아기는 예뻤다. 많은 엄마들이 힘들어 하는 육아를 나는 웃으며 해냈다. 그러는 사이 아기는 내 품을 벗어나 방바닥을 기었고, 두발로 걷기 시작 하더니 금세 집안을 뛰어 다니기 시작 했다. 이제 작고 귀여웠던 아이는 한손에는 야구 방망이를 든 채로, 27인치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누빈다. 3명의 동생들과 함께. 올해로 결혼 11년 차인 나는 그렇게 4명의 어린이를 키우며 각기 다른 4개의 세상을 마주하고 있다.
아기들이 어린이가 되면서 마냥 행복했던 육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리에 매달려 나를 올려다보는 아기는 너무 사랑스러워 차마 그 눈빛을 외면 할 수 없지만, 있는 대로 힘을 주고 꼿꼿하게 서서 나를 노려보는 아이의 눈빛은 나를 부르르 떨게 했다. 좋아. 정신을 집중하자. 우선 쉼 호흡을 하고,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고 했다. 좀 더 단호하게 흔들림 없이...
하지만 현실 속 나는 이미 한손에 주걱이나 파리채를 들고 부릅뜬 눈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많은 육아서를 섭렵 했지만 갖가지 돌발 상황 앞에서 이성의 끈은 쉽게 느슨해지고 만다. 그런 날이면 너덜너덜 해진 멘탈을 붙들고 잠든 아이들 머리맡에 앉아 내가 저지를 온갖 실수들을 헤아린다. 좋은 엄마는 이미 환상 속으로 날아가 버린 현실 육아 앞에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쓸어주고,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는 것으로 나는 나를 위로한다. ‘미안해... ’잠든 아이들 곁에서도 차마 부끄러워 쉽게 꺼내지 못하는 말이 가슴에 쌓인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던 나였고, 그런 마음이 사람을 얼마나 허기지게 만드는 감정인지 알았기 때문에 확신 했다. 나는 아이들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해 줄 것이라고.
막연한 확신 이었고,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엄마’라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 신나서 아기의 작은 입이 언제 또 벌어질까 한시도 아이 곁을 떠나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술술술 막힘없이 표현 하면서부터 한 없이 관대 했던 내 마음은 쪼그라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불러대는 ‘엄마’라는 소리,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반갑지 않았다.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on/off처럼. 잠시라도 off를 켜두고 혼자 있고 싶었다.
나는 아이들을 통제하고 싶었다. 내가 어린이가 아닌 아기를 좋아 했던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일지 모른다. 어린이는 내 품을 벗어나 제 멋 데로 굴지만 아기는 내 품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어르고 달래는 대로 내게 오롯이 자기를 맡기는 존재니까... 이렇게 불손한 마음 탓에 나의 엄마됨은 여전히 괴롭고 힘들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 나는 나의 생각을 말해본 적이 없다. 꼬꼬마 시절 뭣도 모르고 아무 말이나 떠들어 댔던 경험을 빼면 어느 정도 머리가 자란 이후론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되어 세상을 경험한 아버지의 말이 곧 나의 말 이었으며 우리 집안의 말이었다. 이야기 하고 싶었고,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내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내게 없는 것,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아이들한테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는 내가 한 없이 미울 뿐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내게 사랑을 말한다. 혼자 있고 싶어 방문을 닫고 앉아 있으면 문틈으로 쪽지를 넣어 내게 사랑을 고백한다. 성가시고 귀찮아 얼른 들어가서 자라고 말하는 내게 작고 귀여운 손으로 하트를 날리고, 방문이 닫힐 때 까지 동그란 눈을 수십 번 깜박이며 윙크를 한다. 그래도 모자라 다시 방문을 열고 뛰어나와 나를 꼭 안아주고 들어가는 아이들. 내가 정해 놓은 허용범위 안에서만 사랑을 주는 못난 엄마에게 아이들은 한 없이 다정하고 관대하다.
사랑은 더 많은 쪽에서 필요한 쪽으로 흐른다고 했던 작가의 말이 맞다. 오래전 텅 비어버린 내 마음엔 날마다 아이들의 사랑이 흐른다. 내가 아이들을 밀어내고 돌아서도 다시 ‘엄마’ 일 수 있는 이유는 나를 붙잡아 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아이들의 사랑 덕분 이다. 아이들의 사랑은 결코 서툴지 않다. 그 어떤 사랑보다 따뜻하고 온전하다. 나는 그 사랑 덕에 날마다 다시 엄마가 된다.
책을 읽는 내내 어린이였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맞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유아원 변기가 무서워 4살까지 기저귀를 차고 다녔던 나, 둘째 삼촌 집 대청마루 위에 앉아 바구니에 말려둔 강낭콩 두 개를 콧구멍에 넣었던 나, 양말에 구멍이 날 때 까지 맨발로 고무줄놀이를 하던 나, 친구들과 교환 일기를 적으며 사랑고백을 밥 먹듯 하던 나, 공부보단 노는 걸 더 좋아해서 성적표 나오는 날이 제일 싫었던 나, 마음이 헤퍼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나눠 주길 좋아 했던 나...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 나도 가끔은 어린이가 되는 날이 있다. 예를 들어 아이들과 운동장에 가서 시소를 탈 때. 무게가 더 많이 나가는 나 때문에 아이들의 엉덩이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면 -와, 꺄악, 으아악- 다양한 환호성과 함께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나를 흥분시킨다. 그럴 때면 난 누구보다 신나게 시소를 탄다. 구름사다리 위를 뛰어 다니고, 오금에 시커먼 때가 앉을 때 까지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고, 그네에서 뛰어 내리다 몇 번을 모래에 쳐 박혔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어린이의 세상을 만끽한다. -모래가 있으면 떨어져도 아프지 않다던 어린이의 말은 진짜다.
아이들과 만들기를 하거나 그림그리기를 할 때도 그렇다. 선을 따라 정교하게 오리고, 빈 틈 없이 색칠하는 나를 향해 아이가 엄지를 치켜세우면 다시 한 번 자세를 바로잡고 손끝에 온힘을 집중한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이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최고라는 말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하니까. 이렇게 문득문득 어린이가 되어 아이들과 호흡이 잘 맞는 날이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 웃어줄 때도 좋지만 얼굴을 맞대고 함께 웃을 때 행복은 배가 된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어린이 보단 어른이 되는 날이 많다. 보폭을 맞추어 걷다가도 아이의 손을 끌어당기고,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놓곤 흘린다고 타박을 한다. ‘괜찮아, 천천히 해’ 라는 말 보단 ‘정신 차리고 빨리빨리’ 라는 말을 더 많이 한다. 아이가 무언가에 호기심을 보이면 그것이 지적 관심사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앞서가다 혼자 실망을 하고, 아이들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간섭과 개입의 의도가 다분한 잔소리가 대부분이다. 거기에 공부 잘하고 착한 아이였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환상과 기대까지... 어떤 날은 4인분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버거워 일부러 집안을 종종 거리며 바쁜 척 집안일에 몰두하기도 한다.
비양육자인 저자도 저렇게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마주 하는데 대체 난 왜 이럴까. 다정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지금 당신은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냐고 묻는 말에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론 나름의 변명을 생각해 낸다. 저자인 선생님이 아이들을 보는 시간은 하루 한 시간. 정해진 공간과 정해진 시간 안에서 하는 정해진 활동. 사실 이 한 가지 이유면 충분하다. ‘명확한 안전거리’
하지만 엄마인 내게 안전거리는 없다. 독서교실 책상 밑으로 귀엽게 떨어트린 과자 부스러기를 나는 침대와 베개에서 마주해야 하는 날이 더 많고, 양말을 수거하기 위해 가방을 뒤집는 날이면 공처럼 둘둘 말린 짝 잃은 양말이 폭탄처럼 떨어진다. -오늘도 일곱 개의 양말이 아이의 태권도 가방에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식사 후엔 식탁 밑으로 들어가 35개쯤 되는 밥풀을 주워야 하고, 책상위에 올려둔 커피는 종종 한 방울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럴 땐 씨-익 웃으며 내 옆을 스치는 아이가 꼭 있다.
볼일을 볼 때면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놔야 하는 아이가 있고, 양치를 할 때마다 치약에 물을 넣는 아이도 있다. 거품 비누가 헤퍼 고체 비누로 바꾸면 양치 컵에 물을 채운 뒤 비누를 담궈 액괴(액체괴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무선청소기는 날마다 레고를 먹다 체하고, 정수기 앞은 늘 물이 흥건해 작은 샘을 이룬다. 아이 손에 올려진 초콜릿은 사랑을 말하지만 하얀 벽지와 문에 발라진 초콜릿은 긴 한숨을 만들어 낸다. 품위와 체면이 있는 어린이도 안전거리 밖에선 이렇게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나, 둘 씩 하교 혹은 하원과 함께 이어지는 TMI(Too much information) 향연이 끝나면 집안 곳곳에 아이들의 허물(옷)이 놓여 있다. 나는 ‘아주’ 큰소리로 말한다. “십, 구, 팔, 칠, 육, 오!!!!”- 후다닥 아이들이 뛰어간다. 그리고 난 아이의 수첩에 적혀 있는 짧은 글귀를 보며 안도한다.
“ 어머님, 우리 oo이가 얼마나 의젓한지 몰라요. 정리정돈도 스스로 하고 느린 친구들을 옆에서 도와주기도 한답니다. 많이 칭찬해 주세요.” 안전거리 안에서 아이는 이렇게 점잖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좋은 엄마,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작가의 말처럼 포기하고 절망하는 순간 버려진 짐은 결국 우리 아이들이(어린이) 떠안게 될 테니까.
어린이는 작고 약하다. 거칠고 난폭한 세상 앞에 아이는 한없이 취약한 존재가 된다. 누군가는 아이들을 미숙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숙함은 어린이(혹은 청소년)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며, 아이는 그 안에서 마음껏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때문에 인정하고 지지해 주어야 하는 아이들만의 권리이다. 작가의 말처럼 어린이가 어른의 반만 하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가치가 그만큼 작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에게서 미숙함을 배제 하면 무너진 경계로 인해 어린의 세계는 쉽게 침범 당할지 모를 일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그들의 취약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이, 여성, 노인, 장애인, 성 소수자등 사회적 약자라 일컬어지는 이들의 삶이 쉽게 나아지고 개선되지 않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약자의 취약함을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작가의 말처럼 ‘주린이(주식초보), 요린이(요리초보)’와 같이 특정 집단을 빗대어 그들이 가진 취약함을 편견의 대상으로 만드는 건 지양해야 한다. 편견이 낙인이 됐을 때 그것은 너무 쉽게 차별을 정당화 하는 기제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순수한 의미에서 취약함을 인정 한다는 것은 약자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손을 잡고 함께 하겠다는 성숙한 존중의 몸짓이 되는 게 아닐까?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미숙함(발달상의 취약함)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것들,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삶의 많은 부분을 돌아보게 한다. 누군가의 삶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면 순수함에 기댄 어린이의 미숙함 이야말로 가장 반듯하고 온전한 거울이다. 어린이 앞에서 우리가 자주 부끄러움을 느끼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4인분의 세계를 품어야 하는 나의 육아전선은 여전히 매일이 전쟁이다. 저마다의 세상을 가지고 내게 돌진하는 아이들 안에서 나는 자주 넘어지고 길을 잃어버린다. 매일 밤 아이들 곁에서 다짐하는 뜨거운 사랑은 왜 그렇게 빨리 식어 버리는지 자꾸만 흔들리는 아이들의 눈빛을 마주할 때면 어디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다. 반성과 다짐의 시간만큼 온전히 성장할 수 있었다면 난 정말 멋진 엄마가 되었을 텐데... 하지만 난 자아가 쪼개지고 분열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엄마’이길 포기한 적은 없다. 아이가 시간의 흐름 안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어른이 되듯, 반성과 후회 고민과 다짐의 시간들이 얽혀 매일매일 더 나은 엄마이자 어른으로 자라고 있다고 믿으니까.
나는 아이들이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 않길 바란다. 조금 느리고 더딘 삶을 살게 되더라도 ‘어린 이라는 세계’에서 미숙함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길 희망한다. 엄마이자 어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존재들의 미숙함이 그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도록 어린이의 시간을 지지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듯, 어른은 자라서 노인이 된다. 언젠가 노인이 된 우리는 어른이 된 어린이들이 만든 세상의 한 귀퉁이에서 남은여생을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 애쓰며 살아가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지금 이 순간 어린이를 대하는 어른의 태도는 우리가 노인이 되어 마주할 세상의 태도와 결코 떨어져 있지 않다. 어린이와 무관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작가의 말처럼.
책을 덮은 지금 나는, 내가 혹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언제나 희망은 절망을 딛고 일어서야 보이는 법이니까.
-2021.2.22 책 읽는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