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운명이라는 덫(예고된 파국)
마지막 까지 유나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은호를 보며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생각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부지런하고 치밀하게 살인을 하고, 벼랑 끝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에도 어떠한 도덕적 망설임이나 죄책감도 표하지 않았던 유나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유나의 손에 아들까지 잃은 끔찍한 삶을 마치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은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유나는 분명 보았을 것이다. 실패가 두려워 늘 한발 뒤로 물러섰던 은호의 무력함을, 경계를 넘을수록 중심 없이 흔들리다 결국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고 마는 은호의 끔찍한 자기통제를.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계산된 무던함 혹은 아둔함 이었을 거다. 완전한 행복을 위해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는 방법을 택했던 유나처럼, 은호는 자신의 꼬리를 감추려던 어리석은 개의 방식(p256)을 택한 것이다. 유나는 그런 은호의 곁에서 노련하게 자신의 행복을 계획했다.
결국 은호는 노아를 잃게 되지만 소리 한 번 제대로 지르지 않는다. 그의 분노는 차분하고 침착하기까지 하다. 민영과 재인, 진우에 의해 과거 유나의 행적이 하나씩 밝혀지고, 노아가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됐는지 빤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그는 혼잣말을 지껄일 뿐이다.
‘신유나 넌 대체 어떤 사람이니?’
유나의 추악함을 모두 확인한 후에도 책상 앞에 앉아 홀로 뇌까리며 머뭇거리던 은호의 마음을 우리는 정말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한때는 그가 마음을 뺏겼던 하얗고 길고 나긋나긋한 손이(p72) 은호를 구겨 넣은 수레의 손잡이를 잡기 전부터 나는 예상할 수 있었다. 커다란 불행을 피하기 위해 자잘한 삶의 균열을 모른 척 묻어두었던 은호가 결국엔 스스로를 깊은 수렁으로 빠트리게 되리라는 걸.
은호는 다시 시작해야 했다. 유나의 곁을 떠나 얼마간 진창 속에 빠져 허우 적 거리게 되더라도 불행의 그림자를 외면하지 말았어야 했다. 실패가 두려워 무시로 경계를 넘나드는 유나의 광기를 묵인한 삶은 어쩌면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삶 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책을 읽으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부모의 삶에 가려져 한 번도 제 힘으로 삶을 선택해 본적 없이 생을 마감해야 했던 노아와, 무결함에 대한 광기어린 동경으로 유나가 저질렀던 끔찍한 일을 지켜봐야 했던 지유의 삶 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상실, 절망과 불안을 안고 부모의 선택에 따르던 고통의 그림자 안에서 매일을 견뎌야 했던 지유와 노아의 삶이 참혹해 견디기 힘들었다.
특히나 예고된 파국 앞에서 조차 “지유, 잠깐 혼자 있을 수 있지?”라는 말로 너무 쉽게 아이를 유기하고 방치했던 은호를 보며 가슴에서 분노가 일었다. 떼어 놓았어야지,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마지막 파멸의 현장까지 아이는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상했으면서 불안에 떠는 아이는 보지 못하고, 오로지 유나가 어떤 인간인지에만 몰두하고 있는 은호에게 달려가 소리치고 싶었다.
- 제발 정신 좀 차려! 사람이 죽었잖아. 네 자식도 죽었잖아. 넌 비명을 지르고 살려달라고 애원해야지만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거니.‘네’라고 대답하는 지유의 목소리가 텅 비어 있잖아. 지금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네 머릿속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지유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는 거라고!!
누군가 그랬다. 가끔은 모든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최선일 때가 있다고. 하지만 삶이 그렇게 단순하던가?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불행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때론 맞서 싸워야 하는 것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한발 물러나 지켜만 본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엄마의 입을 막지 않는 은호, 할머니의 폭력을 묵인했던 할아버지, 뒤틀리고 과열된 유나의 분노에 물러서고 도망가는 방식으로 침묵했던 가족들, 11년이나 곁을 내주었음에도 준영을 그냥 떠나보낸 재인, 은호가 제 발로 찾아가 묻기 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진오까지. 살기위해, 때론 용기가 없어서, 그게 최선이라 생각해서 했던 사소한 묵인과 방관이 결국엔 파멸의 씨앗이 되었던 것을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은호는 말한다. 그런 여자와 결혼이 아니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p518). 나는 그의 말에서 끝까지 꼬리를 감추려고만 하는 비겁함을 보았다. 운명이라는 극단 안에 자신의 행적을 감추고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함. 그리고 유나의 광기 뒤에 숨어 있던 그녀를 둘러싼 이들의 비겁함 까지.
언제든 물러서는 것은 쉽다. 행복하기 위해서, 너를 위해서, 사랑해서, 잘 살기 위해서, 이게 최선이라서 따위처럼 그럴싸한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조차 우리의 선택 이였다는 것을 나는 은호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이제 운명의 상자를 열고 밖으로 나오길, 운명에 취해 눈부셨던 유나의 그림자를 쫓을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너의 삶을 보라고 말이다. 그것만이 아직은 무사한 은호의 삶을 불행으로부터 건져줄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지유의 행복을 빈다. 작은 소녀가 제 스스로의 날개로 고통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기를, 어디든 훨훨 날아가 부디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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