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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도서]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저/이신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소설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오만과 편견>, <테스>, <폭풍의 언덕> ...

중고등학교 시절 책을 읽는다는 친구들은 이런 책들을 읽고 있었어요. 그 당시엔 책의 두께에, 작은 글씨까지 저는 선뜻 시도하지 못한 책들이었는데요. 한참 후가 된 지금에서야 이런 책들이 눈에 들어오네요. 아무리 그래도 예스러운 말투와 시대, 배경에서 선뜻 집어지지는 않긴 하죠. 그래도 '이런 고전들을 이제는 좀 읽어봐야겠다' 시도하게 되는 건, 고전을 현대적인 감각에 맞추어 번역과 표지로 독자들을 유혹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앤의 서재'에서 나온 이 책 <폭풍의 언덕> 또한 고풍스러운 배경색에 세련된 핑크색이 조화를 이루는 책 표지가 눈길을 끄는데요. 500여 페이지나 되는 줄은 생각하지도 않고 충동적으로 제가 이 책에 달려들게 된 이유기도 합니다.

 

'1801년. 방금 집주인 댁에 다녀왔다.'

이 책의 첫 문장입니다. 에밀 브론테가 태어나기도 20여 년 정도 전이되겠네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인 그 해의 이야기를 써 낸 것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어디에서 저 시기의 배경을 알 수 있었을까요?

 

줄거리

 

록우드는 히스클리프의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를 빌려 살기로 합니다. 히스클리프는 '워더링 하이츠'에 살고 있는데요, 록우드는 인사차 그 집을 방문합니다. 집안 분위기가 뭔가 이상합니다. 손님인 록우드에게 쌀쌀맞고 예의 없으며, 손님에 대한 배려조차 이들은 모르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히스클리프, 그의 며느리 캐서린, 헤어턴, 조지프, 질라가 그렇습니다. 그 집안의 상황을 궁금해하며 알고 있을만한 사람을 찾던 차에 록우드는 자기가 머무는 집에서 딘 부인을 찾아냅니다. 몇 차례의 딘 부인의 이야기를 통해 '워더링 하이츠'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을 듣게 되죠.

(딘 부인, 넬리가 일하는 집의) 주인 언쇼는 리버풀로 갔다가 한 집시 소년을 데려오며 폭풍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그저 그가 갈 곳 없어 불쌍해 보인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로 히스클리프예요. 히스클리프가 들어온 이후, 이 집의 장남인 힌들리는 아버지로부터 신뢰를 잃어요. 반대로 히스클리프는 신뢰와 보호를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힌들리는 억울해 하고 히스클리프한테도 당하죠. 그 와중에 히스클리프와 힌들리의 여동생 캐서린 언쇼는 굉장히 친밀한 사이가 되어갑니다. 아버지 언쇼와 어머니가 죽고, 집의 주인이 된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이때다 싶어 종처럼 부립니다. 그동안 아들로서 자신의 사랑을 앗아갔다고 보는 히스클리프에게 못되게 굴죠. 캐서린도 히스클리프와 친하긴 하지만, 자신의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에드거 린턴과 결혼하려고 합니다. 에드거의 프러포즈를 수락한 캐서린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조건을 선택해서 결혼하는 데에 혼란을 느끼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넬리(딘 부인)에게 토로해요. 그 대화를 히스클리프가 듣고 집을 나갑니다.

힌들리는 결혼을 했지만, 사랑하는 부인이 아기(헤어턴)을 낳고 죽었어요. 캐서린은 에드거와 결혼해서 시누이 이사벨라와 함께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때, 히스클리프가 돌아오며 다시 폭풍의 전조가 보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벌었는지 몰라도, 히스클리프는 돈을 벌어 자신의 복수의 대상인 힌들리 언쇼의 집으로 세를 살겠다며 들어가죠. 히스클리프는 캐서린 린턴에게 돌아와 자신의 모습을 보입니다. 가출해서 소식을 알 수 없던 히스클리프가 돌아오자, 병에 걸려 아팠던 캐서린은 활기를 찾게 돼요. 하지만, 둘의 만남, 그게 너무 과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자주 캐서린을 찾아오려 했고, 그게 캐서린의 남편인 린턴은 맘에 들지 않았죠. 그리고 그 상황에서 린턴의 여동생인 이사벨라는 히스클리프를 짝사랑하고요. 캐서린의 오빠 힌들리는 아내가 죽고 망상과 알코올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재산을 탕진해갑니다. 히스클리프는 이사벨라와 결혼하지만, 그건 캐서린의 남편 에드거 린턴을 도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캐서린이 오랜 병과 함께 정신병으로 아기(딸 이름도 캐서린)을 낳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녀의 오빠 또한 머지않아 세상을 떠납니다. 히스클리프가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이 됩니다. 이사벨라는 그(히스클리프)로부터 도망쳐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 죽습니다. 결국 그 아이를 히스클리프가 키우게 됩니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의 아들과 에드거 린턴의 딸을 결혼시키기 위해 계략과 협박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데요. 그들은 결혼할 수 있을까요? 히스클리프의 잔행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

 

제가 생각하는 <폭풍의 언덕>이란 책은요, 그 책의 가장 정점은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정말 <폭풍의 언덕>을 하나도 몰랐으며 대단한 착각을 했던 거지요. 제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뜨거운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리다면 어릴지 모르겠지만, 이들의 사랑은 한결같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어요.

 

"너랑 에드거가 내 심장을 찢어놓았어, 히스클리프! 그래놓고 둘 다 되레 불쌍한 건 자기들이라는 듯 나한테 와서 한탄을 하네? 천만에, 난 네가 불쌍하지 않아. 넌 날 죽였어. 나를 죽여 네가 살았나 보지. 네 목숨은 참 질겨! 내가 죽고 나서 얼마나 더 사시려고?"

그녀를 안으려고 한쪽 무릎을 꿇었던 히스클리프가 일어서려 하자 아씨는 그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억지로 앉혔어요. ...

"이렇게 널 잡아두고 싶어! 우리 둘 다 죽는 그날까지 이렇게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네가 얼마나 괴롭든 난 상관하지 않을 거야. 네 고통 따위 내가 알 바 아니지. 왜 너는 괴로우면 안 돼? 난 괴로운데! 너는 날 잊을 셈이구나? 내가 땅에 묻히면 넌 행복할까?...."

...

"그만해! 나까지 너처럼 미쳐야겠어?" p.276-277

 

주고받는 말은 또 얼마나 폭력적이고 잔인한지요. '나는 이렇게 사랑하는데 왜 너는 몰라주지? 넌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를걸? 내가 이러는 건 순전히 너 때문이야!' 이게 그들의 사랑의 주된 표현이었어요. 물론 평생 서로를 못 잊고, 각자에겐 세상에 오직 유일한 사랑이기도 했다는 점만은 감동적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들이 만나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과연 결실을 이룰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격정적이고 열정적이며 한결 같긴 했지만, 그만큼 서로에게 잔혹하고 끔찍했어요. 마치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 같았죠.

 

사랑에 미친 광기의 아이콘, 히스클리프

 

히스클리프의 광기 어리고 폭력적인 모습에 한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마치 요즘 말하는 죄에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1800년대 판 '소시오패스'를 보는 듯했죠. 로맨스 소설로만 알았는데, 이 책은 '히스클리프'란 인물 하나 때문에 공포 스릴러를 보는 듯했어요. 히스클리프가 사람을 폭행하고, 억압하며, 감금하는데 제가 마치 당하는 것인 것처럼 두렵고 끔찍했어요. 물론 그를 상대하는 이들 또한 괴기스럽고, 상식을 벗어난 듯한 행동과 말들이 많이 보이긴 했는데요. 그들은 히스클리프처럼 '악'에 집요하거나 집착하진 않았고, 자신의 삶을 충실히 지켜나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그와는 분명 다른 점이예요. 네! 유독 '악'을 향해 앞서 나가는 인물이 바로 '히스클리프'였어요. 사랑받지 못한 상처와 짐승처럼 취급받으며 당한 멸시가 한 사람의 분노를 어디까지 치닫게 하는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신랄하고 다듬어지지 않았을까?

 

위에서 말했듯이 (말과 행동에서) 히스클리프만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몇 인물(딘 부인, 에드거 린턴, 캐서린 린턴(딸)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대부분이 자신에게 주어진 충격적인 운명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듯 보였어요. 물론 '정신병'도 큰 이유에 속하죠. 그들의 말과 행동에선 어떠한 필터도 없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보였어요. 인간의 내면과 욕망,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작가의 의도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이유로 인물들이 그렇게 잔인하게 거침없이 말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사회화' 교육이 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보기도 했어요. 예의와 매너를 배우는 사회에서는 교육된 말과 행동으로 인간의 속내가 많이 가려질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스러시크로스 그레인지'와 '워더링 하이츠'라는 그 좁은 사회에서 각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교육이 제공되었을까요? 그들만의 사회에서 '예의'와 '배려'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가왔을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좁은 사회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거침없이 발설한 건 아닐까요? (작가의 의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저 혼자 생각해 본 것이니 이런 견해도 있구나 하고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초라한 결말이야, 그렇지? 내 맹렬한 분투가 참으로 우습게 끝나버렸어! 두 집안을 박살 낼 쇠지레와 곡괭이를 구하고 헤라클레스 같은 능력을 갖고자 나 자신을 단련하는데, 막상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힘이 생겼을 때는 어느 집이고 간에 지붕의 돌판 하나 들어낼 의욕조차 사라졌다는 걸 깨닫는 거야! 난 옛 원수들에게 지지 않았어. ... 지금이야말로 그 후손들에게 직접 복수하기 알맞은 때지.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무엇도 날 막을 수 없고. 한데 다 무슨 소용이지? 난 관심도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아! 이러니까 마치 내가 관용이라는 멋진 자질을 과시하려고 이제껏 그리 용을 쓴 것처럼 들리는군. 그건 절대 아니고..... 이제는 그들을 무너뜨리는 게 통쾌한지도 모르겠고, 쓸데없이 누굴 무너뜨리려 하기엔 내가 너무 게을러. ... " p.558

 

 

복수의 끝을 치닫고 있는데 히스클리프는 어느 순간 멈춰버립니다. 앞뒤 없이 휘두르던 칼날이 이렇게 멈추는 걸까요? 복수가 우리에게 남기는 결말은 무엇일까요?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어떻게 넘겼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잘 읽었습니다. 히스클리프 집에 살던 사람들의 관계가 어떻게 된 건가 하나도 알 수 없었는데, 딘 부인을 통해 하나하나 타래가 풀리는 듯 이해가 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이리도 복잡한 몇 가정 속 서사의 폭풍에 제가 다 휘말려있다가 빠져나온 느낌이에요. 다 읽고 나니, 폭풍이 휘몰아치는 날씨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던 '워더링 하이츠'가 한 고비를 넘기고 굳건하게 서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합니다.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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