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빌려서 읽었던 역사학자 김재원 님의 책이 e-book으로 출간되어 북클럽에 나왔다. 반가운 마음에 다시 읽다보니 종이책으로 꼼꼼히 보고,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 구매했다.
380 페이지에 고조선부터 20세기 말 IMF까지 다루는 이 책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국사’라는 제목보다 ‘읽는 것만으로 역사의 흐름이 머릿속에 들어온다’는 부제에 더 충실하다.
학교에서 열심히 배우고 암기해서 시험도 잘 봤는데 그 때는 왜 흐름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교과서의 문제일까? 아니면 과거의 내가 미숙했기 때문일까? 아마 두 가지 모두 해당되겠지만 교과서와 이 책의 차이를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어서 최근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도 한번 훑어보았다. 물론 내가 배웠던 80년대의 국정교과서와 현재의 검인정 교과서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교과서 특유의 시각은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책은 교과서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공통점은 왕조 중심의 정치사라는 거다.
평민이하의 사람들은 현대사쯤에야 등장하고 왕조 교체나 혁명의 과정에서도 주로 왕과 그 주변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책은 교과서와 달리 백과사전적 역사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왜?’라는 의문을 던짐으로써 사건을 재해석하고 현재와의 관련성을 찾는다.
백제는 외교의 힘을 잘 아는 나라였다. 동시에 문화적으로 중국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나라다. 외교는 정치, 경제적 교류인 동시에 문화적 교류다. 당시 백제는 동북아시아 문화 교류 네트워크의 허브로서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발 빠르게 배우고, 가야와 신라를 거쳐 왜에 전달하는 통로였다.
...
백제는 나라의 영토가 엄청나게 넓지도,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중국 왕조로부터 꾸준히 인정받아온 강국이었다. 우리가 백제의 역사로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교과서 속 지도에 연연해 역사에 존재했던 다양한 나라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단순한 진리다.
(p55~56)
광활한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으로 기억되는 고구려, 삼국통일과 화랑정신으로 상징되는 신라에 비해 백제는 별달리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4세기 근초고왕의 시대 외에는 고구려와 신라에게 계속 밀리다가 결국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했다는 것 정도만 기억한다. 문화강국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수학여행지로 유명한 경주와는 달리 공주나 부여의 유적을 직접 볼 일은 거의 없으니 와 닿지 않았다.
자료를 검색해보니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660년까지, 677년이나 존속했던 고대 국가다. 영토도 넓지 않고 군사력도 허약했던 백제는 어떻게 600년 이상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백제의 외교력에서 찾는다.
강대국 고구려에게 쫓겨야하는 백제는 한반도 내의 신라, 가야 뿐 아니라 중국의 동진과 바다 건너 왜와도 적극적인 외교를 맺어 온갖 위기를 버텨낸다. 백제는 연호를 따로 쓴다거나 황제를 칭하는 등의 허세 없이 자신들의 힘을 객관적으로 파악한다. 그들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발전시키고 이웃에 전달하는 방법으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15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의 시점으로 보면 외교를 잘했다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지만 누가 강성해지고 누가 패망할지, 언제 친구가 적이 될지 모르는 당시의 상황에서 자신이 처한 입장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해 적절한 외교를 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강대국에 둘러싸여 고전하면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백제에게서 지금의 대한민국이 보인다. 작지만 문화강국으로 인정받는 탄탄한 나라 백제. 그때 보다 인구도 많아지고 지식도 훨씬 더 쌓인 지금 우리는 백제보다 탁월한 외교를 펼치고 있을까? 그들의 외교전략에서 배울 점은 없는지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망국의 유민들은 긴 전쟁 여파 때문에 신라인으로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백제만 해도 의자왕의 항복으로 신라와의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고는 왕족과 고의 관료, 일반 백성까지 총 1만여 명이 넘는 백제인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점령군의 고압적 태도를 백제인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강압 정책은 백제 땅에 안정을 주지 못했다. 당나라에 끌려가지 않은 왕족을 비롯한 각지의 구(舊) 백제 지배층은 당나라에 충성하는 길이 아닌 백제의 부흥을 원했다. 초반 기세가 엄청났던 백제 부흥 세력은 옛 백제의 200여 개 성을 장악하는 등 백제가 아직 살아 있음을 신라와 당나라에 알렸다.
하지만 곧 전세가 뒤집힌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당나라가 백제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웅진 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됐기 때문이다. 옛 최고 윗선인 부여융이 당나라 깃발을 들고 “깃발만 바뀐 거니까 원래대로 시키는 대로 하면 돼. 편하게 생각해”라고 손짓하자 명분 싸움에 밀린 부흥 운동 세력은 급격히 와해된다. 이후 백제인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p.101)
우리는 경술국치 이후 조선의 왕족과 지배계급이 보여준 친일적이고 나약한 행태에 분노하고 실망한다. 그런데 역사를 찾아보면 기회주의적이고 비겁한 태도는 꼭 조선 왕실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통일 전쟁을 벌이던 시기 신라의 지배층은 고구려와 백제의 고위급 인사를 포섭한다. 결사 항전할 것 같았던 그들은 실망스럽게도 신라가 기존의 사회적 지위와 현실적 이익만 보장해 준다면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면 언제 저항할까? 최종 결재자가 바뀌고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때 그들은 명분을 들먹이며 아랫것들을 독려해 일어나 싸우자고 한다.
지금은 어떠한가?
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누가 싸우고, 누가 새로운 권력에 편입되어 지배층으로 살아남을까? 고위층 대부분이 군 면제이거나 이중국적자인 현실을 생각하면 예전과 다름없는 모습이 되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에 씁쓸해진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이에 따라 근대화의 물결이 요동치던 바로 그 시절, 태어난 신분에 따라 지위와 계층이 결정되던 사회는 무너진다. 이제 능력만 있으면 경쟁을 거쳐 원하는 지위를 획득하는 일이 형식적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중요해진 것이 바로 새로운 배움, 즉 근대 교육의 수료였다.
근대 교육 기관에 입학하는 것은 계층 이동의 필수 과정으로 굳어졌다. 그 과정은 점점 상급 교육 기관에 들어가야만 더 높은 계층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진화한다. 그러니까 성공하고 싶을수록 더 공부해야 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p.322)
저자는 한국 사회 교육열의 시작을 일제시대 민족 차별 정책에서 찾는다. 일제는 각종 임용시험이나 전문직 시험에 학력 사항을 두었는데 그 학력을 얻는 기회가 조선인들에게는 극히 차별적이어서 불만이 누적되었고 그 와중에 3.1운동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일제시대에 상급 학교 졸업장은 성공의 필수요소였고 안정된 삶은 원하는 조선인들이 교육받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이 다닐 수 있는 학교의 숫자는 턱없이 적었고 학제 또한 조선인에게 불리했다. 참고로 당시의 중등학교 입시 경쟁률이 전국 평균 6:1, 서울 평균 10:1이 넘었다고 하니 현재의 명문대 입학 경쟁 못지않다. 더구나 대학은 경성 제국대학 하나뿐이라 중등교육기관은 대입 준비기관이 되었다. 그 상태로 해방을 맞았고 대학의 숫자는 늘었지만 아직도 비정상적인 교육열은 일제시대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이 책은 근현대로 갈수록 분량이 많아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축소된 부분이 많다.
저자는 해방 이후의 현대사에 대해 제주 4.3 사건, 이승만 독재와 4.19혁명, 박정희의 군부 쿠데타와 냉전을 이용한 유신독재를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한국 경제 압축성장의 부작용으로 인한 삼풍백화점 붕괴와 IMF사태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5.18 민주화 운동이나 6월 항쟁 등 80년대의 굵직한 역사가 생략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과 집중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380페이지의 지면에 5000년의 한국사를 인과관계에 집중하여 기록한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원한다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이해도 못한 채 암기해야만 했던 역사적 사건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면 흥미 있게 읽을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