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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도서] 일기 日記

황정은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어느 유튜버가 필사하기 좋은 책으로 추천한 에세이집이다.

필사하기 좋은 책. 작가에게 그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정작 필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눈으로 베껴 쓴다는 기분이 들만큼 문장부호, 줄 바꿈, 어휘선택, 문장의 길이까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평소 같으면 후루룩 읽었을 만큼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후딱 읽고 던져놓고 싶지 않았다.

 

일기. 제목처럼 늘 몸에 지니고 다녀도 좋을 법하게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책이다.

저자, 황정은. 책날개에 얼굴 가린 사진 한 장과 프로필도 없이 소설가라는 간단하다 못해 빈약한 작가 소개가 있다. 약력 몇 줄 넣기가 어려워서 생략한건 아닐테고, 뭔가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며 검색해 봤다. 76년생, 불문과 중퇴. 의 그림자, 야만적인 앨리스씨등의 장편소설과 디디의 우산, 연년세세등의 소설집을 출간했다. 최근 문학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항의한 일로 뉴스에도 등장했다. 세월호, 미투, 소수자 인권 문제 등, 사회의 여러 문제를 고민하고,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작가다. 그러다 보니 책에 수록된 열한편의 에세이도 대부분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세상과 손잡고 있다.

 

수명壽命의 명엔 타고 났다는 의미가 있고 그 때문인지 나는 가끔 수명이나 이라고 말할 때 그 목숨이 본래 가진 길이를 본 것처럼 말한다. 명이 다했다고 말하고, 명이 줄거나 늘었다고 말하고, ()명을 연장하고 단축했다고 말하면서 ...... 하지만 지금 사람들의 명은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조構造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의료서비스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지, 어떤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혐오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 어떤 형태의 가난을 겪었는지/겪고 있는지, 어떤 제도와 정책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어떤 정책이 부재한 채로 그 부재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지 등등이 전부 명의 조건이다.

(p34)

 

문득 시간을 생각하고, 나와 주변인들의 나이를 헤아려보고, 인간의 DNA와 노화를 떠올리고, 그 다음엔 주어진 수명을 살 수 없는 소수자의 문제에 눈을 돌린다. 의식의 흐름을 논리정연하게 확장시켜가며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간다. ‘일기라는 제목 때문에 신변잡기식의 가벼운 이야기를 예상했지만 글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가장 사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신에게 매몰되지 않고, 서로의 이음새를 보고, 모두의 안녕을 걱정한다.

게다가 저자는 그저 참여하거나 문제를 지적하는 데만 의의를 두지 않고, 용기 있게 자신의 피해 경험을 토대로 해결책을 찾아내,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자 노력한다.

 

어린 시절의 나를 탓하지 않는다. 그 일들을 내가 원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이렇게 된다고, 결국엔 무감해지고 괜찮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경우엔 만날 때마다 그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친척들과의 왕래를 뒤늦게나마 중단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내가 겪은 어려움이 그것만은 아니었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그러나 그 순간들을 잊은 적은 없다.

(p.180)

 

가장 충격적인 챕터였던 흔.

부모님의 살뜰한 보살핌 없이 고군분투해야 했던 어린 시절, 아무도 방어해주지 않던 그 때 겪은 성폭력은 오래도록 트라우마가 되었고, 저자는 아직도 어제 일처럼 괴로워한다. 가해자인 사촌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여전히 애써 외면하는 중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더 화나는 건 부모의 뜨뜻미지근한 태도, 그리고 더더 노여운 일은, ‘커서 뭐가 되려고라는 죄책감을 피해자가 짊어지도록 만드는 닫힌 사회였다.

 

처음엔 얼마나 잘 쓴 글인가에 주목하고 봤는데 뒤로 갈수록 단어나 문장, 문체보다 작가 자신에게 몰입하게 되었다.

필사를 추천할 정도로 문장이 아름답다고 해서 읽은 책이다. 내가 아름다움이란 말의 뜻을 오해했나보다. 아름답다는 걸 그저 미사여구나 깔끔하고 정갈한 문체 정도로만 이해했으니 말이다. 이 책의 문장들은 분명 아름답지만 그것은 손끝으로, 머리로 얻어진 게 아니었다. 진주를 껴안듯 그렇게 아파하고, 당장 손해 볼망정 차마 남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살아온 당당한 결과물임을, 이제는 안다.

어찌어찌 연습해서 문장은 그럴듯하게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진실을 파고드는 올곧은 그 마음을 반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일일이 베껴 쓰지는 않았지만 빨리 읽고 넘기기 아쉬워 한 문장, 한 문장,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따라 쓰기에도 좋지만, 소리 내어 읽기에도 적당하다는 것을.

눈으로, 입으로, 손으로. 그렇게 공들여 읽고 싶은 책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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