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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왜 장화를 신었을까

[도서] 고양이는 왜 장화를 신었을까

박신영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박신영 작가의 고양이는 왜 장화를 신었을까에는 라는 부사가 숱하게 등장한다. 왜 고양이는 장화를 신었나, 왜 제우스는 바람둥이이고, 왜 신데렐라는 12시 전에 집에 와야 하나.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 생텍쥐베리의 작품 속 어린왕자처럼 묻고, 또 묻고, 지겹게 물어댄다. 아마도 부모님과 선생님을 엄청 귀찮게 하는 어린이였으리라. 저자는 더 이상 자신의 질문에 답해줄 어른이 없음을 알고, 스스로 백마 탄 왕자를 찾아 모험을 떠난다.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가 아니라 왜 백마 타고 떠났는지 물어보려고. 그런 집요한 질문의 결과물이 백마 탄 왕자는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였다. 그리고 제목만 봐도 후속작임을 짐작할 수 있는 이 책 고양이는 왜 장화를 신었을까는 전편보다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심화편이다.

 

<27편의 명작으로 탐색하는 낯선 세계사>라는 부제처럼 이 책에는 27편의 이야기가 시간 순으로 등장한다.

<장화신은 고양이>, <브레맨 음악대>같은 익숙한 이야기들. 그저 동화를 읽어봤다는 수준에서 만족했을 뿐 왜 고양이가 장화를 신었는지, 동물들이 왜 브레맨으로 가려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덕분에 저자의 벼려진 시각으로 다시 보는 동화들은 재해석을 넘어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다가왔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를 소개해보겠다.

 

그리스신화 속 많은 신과 영웅들은 성폭력과 불륜을 일삼았다. 그 이유는 당시 그리스의 지배자들이 자기네 민족과 가문의 지배가 정당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해 신화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단지, 신화가 어느 한편의 지배를 합리화하려는 의도에서 기억된 역사이기에 그렇게 된 것뿐이다.

그리스신화만이 아니다. 현실의 권력을 가진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와 역사 서술을 통해 지배하려 든다. 다양한 방식으로 전해지는 다른 역사를 지우고 왜곡하여 사람들이 오늘의 폭력을 자연스러운 질서로 여기게 만든다.

(p.24)

 

제우스는 왜 바람둥이일까?

저자는 역사 속 지배층이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제우스를 비롯한 신화 속 신과 영웅을 이용하고, 더불어 자신들의 권력과 폭력조차 세상의 질서로 받아들이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권력에 기댄 폭력을 합리화하는 제우스의 신화가 여전히 진행형임을 알려주고, 오래전 얘기라며 비판 없이 신화를 수용하는 자세가 얼마나 위험한 행위인지를 지적한다. 신화를 통해 지배층이 어떻게 민중을 지배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야기를 그저 이야기로 대하지 말고 그 안에 숨은 지배자의 폭력과 의도를 읽어낼 줄 알기를, 나아가 새로운 이야기로 부당함에 저항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고양이가 셋째 아들에게 승마용 부츠를 달라고 한 것은 총사의 자격을 요구했다는 뜻이다. , 고양이는 활동하기 전에 자신을 주군에게 헌신하는 총사로 임명해주기를 원한 것이다.

(p.88)

 

서유럽 중세 봉건사회를 반영한 동화,<장화신은 고양이>.

저자는 동화 속에서 셋째 아들이 고양이 밖에 물려받지 못하는 이유를 중세의 장자상속제에서 찾고, 풀밭과 보리밭이 언급되는 한 줄로 삼포제가 정착되어 윤작하던 시대보다 농업생산량이 늘어났음을 알아낸다. 더불어 잦은 전쟁과 정략 결혼으로 장원의 소유주가 자주 바뀌었음을, 그래서 농민들이 영지가 카라바 후작의 것이라는 고양이의 거짓말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그나저나 고양이는 왜 장화는 신게 되었을까? 위의 인용처럼 장화, 즉 승마용부츠는 귀족의 비서였던 총사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신분 상승의 기회가 많았던 17세기, 고양이는 힘없는 귀족의 비서가 되어 주인의 성공을 돕고, 자신도 공로를 인정받아 신분 상승한다. 저자는 이 동화가 셋째 아들과 고양이의 성공담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계몽철학을 접하고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셋째 아들과 고양이의 후손이 프랑스혁명을 이끌었다고 말이다.

어린 시절 재밌게 읽고 묻어두었던 동화. 고양이가 말하고, 장화를 신고 주인을 돕는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이렇게 생생히 부활시켜 역사와 연결 짓는 저자의 통찰이 놀랍다.

 

숲으로 도망간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의 집에 살게 된다. 공주는 집안일을 한 후에 저녁밥을 지어놓고 난쟁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동안 난쟁이들은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했을까? 농사지을 밭도, 장사할 상점도 없는 깊은 숲속이었는데.

(p.235)

 

전편에 나왔던 <백설공주>가 이번에도 등장한다. 산업혁명과 근대화, 경쟁의 뒤편이라는 장의 첫 번째 동화로 말이다. 백설공주와 산업혁명이라니, 간극이 크다. 저자는 이 거리를 깊고도 넓은 지식과 통찰, 논리로 좁혀가며 독자들에게 동화 속에 감춰진 또 하나의 진실을 보여준다.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석탄산업과 탄광촌의 좁은 갱도에서 일하느라 성장하지 못하고 난쟁이가 된 어린 광부, 그리고 집에 남아 살림해야 했던 일곱 살, 백설공주 또래 여자아이들의 슬픈 현실을 곱고 여린 <백설공주> 동화 속에서 짚어내며 근대사의 이면을 설명한다.

 

신데렐라, 백설공주, 차남 이하의 아들 이야기 등. 전작과 겹치는 동화도 종종 보이지만, 작품을 접하는 시각은 겹치지 않는다. 저자는 대체 몇 겹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걸까. 이렇게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사물을 해석하고 자기 생각으로 벼리려면 얼마나 많은 지식을 쌓고 생각을 해야 하는 걸까.

저자의 깊고도 넓은 지식과 통찰로 깨닫게 된, 이야기속의 진실도 놀랍지만 책을 통해 얻은 건 그 뿐만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나 원래 그런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며, 모든 사물에 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답을 찾아 끝없이 탐구하고, 마침내 그것을 자기화 하는 적극적인 행동. 책에 소개된 어떤 지식보다 더 배우고 싶은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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