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메르시어의 장편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강렬한 소설을 만났다. 빨리 읽고픈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문장을 곱씹게 되는 소설. 느낌으로만 어렴풋이 인지하던 그 감정을 정말 언어로 표현해 내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 감동받았다.
또한 작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파스칼 메르시어는 일전에 읽었던 《자기 결정》의 작가이기도 했다. 김영하 북클럽 이 달의 도서에도 선정되어 많은 분들께 사랑받았던 그 책의 저자는 페터 비에리라는 인물이었다. 알고 보니 같은 인물이 필명을 쓰고 있었다.
소설을 집필할 때는 파스칼 메르시어로, 전공인 철학 저서를 집필할 때는 페터 비에리로. 아, 이조차 매력적이라니. 이 매력적인 인물은 주체적인 삶을 살고 내 삶의 존엄성을 잃지 않기 위한 가장 중요한 노력 중 하나는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라 한다. 이 소설도 그런 의의를 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스위스 베른의 고전문헌학 교사 그레고리우스는 학교에서 '걸어 다니는 사전'으로 불리며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선생님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다리를 건너 출근하는 그는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다리가 막혀 돌아가야 했다.
그날 폭풍우 속에서 이름 모를 포르투갈 여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앞으로 무한한 경험과 가능성을 마주한 학생들과 달리 이미 황혼기에 접어든 자신의 인생엔 무엇이 남았는지? 잠시 생각하던 그는 수업을 중단하고 학교를 뛰쳐나온다.
알 수 없는 불안과 해방감이 섞인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는 몇 년 만에 에스파냐 책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발견한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에서 자신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문장을 발견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일은 그에게 처음이었다. 매일 같은 삶을 반복하던 그레고리우스는 강한 끌림을 느끼고 실행에 옮긴다. 물론 이후에도 잠시 갈등하며 흔들리기도 했지만, 자기 인생에서 이렇듯 옳고 의미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거라 생각하며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른다.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 아마데우 드 프라두를 직접 만나고 싶어 주소를 알아내 찾아가지만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아마데우의 일생을 추적한다.
살라자르의 독재 정권 아래 누구도 믿을 수 없던 시절 아마데우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존경받는 의사였지만 비밀경찰의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그동안의 명성을 모두 잃고 죽기 직전까지 저항 운동에 참여했던 아마데우 드 프라두.
그레고리우스는 무엇을 위해 타인의 삶을 쫓아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떠난 것일까? 알 수 없는 충동, 불확실한 열정으로 그는 낯선 도시에 있었다. 아마데우의 생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이 여정은 탄압받던 격정의 시대를 관통하며 그레고리우스의 삶과 연결되었고 이를 통해 그는 한 뼘 성장한다.
아마데우는 독재 정권 아래에서 표현의 억압에 저항하고 독재자의 가치 없는 구호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메멘토 모리. 죽음이야말로 매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아름답게 할 수 있고, 죽음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이야 올 때가 되면 오는 거지. 달라질 거라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데우는 이렇게 답해준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해." 그렇다면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메멘토에 대한 대답도 이어진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소원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기. 나중에도 언제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하는 습관을 깨부수기, 메멘토를 안락함과 자기 기만과 꼭 필요한 변화에 대한 불안에 대항할 도구로 사용하기, 오래 꿈꾸어오던 여행을 떠나기, 이런 언어들을 배우고 저런 책들을 읽기.
타인의 빈정댐, 잘난 척, 그 외의 변덕스러운 판단 등 지나치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더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다른 사람을 인정한다는 말을 소리 내어 발음하기.. 어쩌면 내일일지도 모를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며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에 의식을 집중하라고 그는 일러준다.
한때는 어린 마음에 삶이 영원하다고 여기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이 소설은 메멘토 모리가 일깨워주는 현재,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존재하는 죽음을 의식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고 있었다.
상당히 관념적이지만 유려한 문체에 매혹되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한 사람의 인생을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는 시선도 좋았고, 불확실함으로 인해 삶이 버거워질 때 언제든 이 소설을 다시 펼치면 그레고리우스의 여정을 함께 하며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