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영화는 여러 번 반복해서 본다. 이해력이나 기억력이 좋지 않아 영화를 한 번 보는 일 만으로는 놓치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덕분에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이 말한, 영화를 사랑하는 3단계 가운데 첫 단계는 실천하는 셈인데 요즘은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시나리오나 스크립트를 활용한다. 시나리오나 스크립트에는 영화의 디테일까지 쓰인 경우가 많아 영상으로는 놓치기 쉬운 부분들을 효율적으로 파악하기 좋기 때문이다.
『벌새 :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은 제목 그대로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의 시나리오집이다. 최종 개봉된 영화에는 편집된 분량이 오롯이 담긴 원본 시나리오에 영화에 대한 네 편의 에세이와 한 편의 대담이 더해진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벌새』 시나리오집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영화를 먼저 보고 시나리오집을 읽었다. 벌새단이라 불리던 열성적인 팬들만큼 N차를 뛸 정도는 아니었고, 극장에서 한번, 김보라 감독님의 북토크에 가기 전에 시나리오와 인터뷰 한번, 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할 때 한번 봤을 뿐이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인물과 관계, 시대와 집단적 참사의 기억을 다루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94년이란 시대 특성상 삐삐나 카세트테이프, 미치코런던 등 추억의 아이템과 브랜드가 등장함에도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볼 수 있던 그 시대에 대한 추억의 정서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은희가 겪는 관계와 단절에 몰입했기 때문일까. 시나리오에도 추억의 아이템에 대한 특별한 강조는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94년의 김은희가 아닌, 열다섯살의 김은희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젊은 관객들에게도 공감을 얻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영화에서 헷갈렸던 부분에 대한 확신을 얻기도 했고 미처 하지 못한 생각들을 하기도 했다. 은희가 버스를 타고 가다 귀 뒤쪽에 난 혹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장면이나 온 가족이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할 때 자기네 가게 고춧가루의 질에 대해 항의한 손님을 욕하던 아버지의 대사, 힘들 땐 자기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하나씩 움직여본다던 영지의 말 등에서였다. 특히 손가락에 대한 영지의 대사는 지금의 감독이 과거 은희 나이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로만 봤다면 영지가 은희에게 한 말로만 생각했을 장면에 왜 이런 감상이 들었을까. 시나리오를 읽는 일이 배우와 연출의 장막―말 그대로 스크린을 거둬내고 감독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이하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팔롱도르와 오스카를 거머쥔 2019년은 한국영화역사에서 중요하게 기록될 것이다. 그 기록에서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기생충>만큼이나 중요한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소감으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을 인용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 이란 말을 했다. 그 말은 곧 <벌새>를 두고 한 말에 다름 아니란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