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대부분 카펫 생활을 한다. 카펫 특유의 아늑함도 있고 이런저런 장점들이 많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바로 청소가 힘들다는 점이다. 어제 오늘 얼룩진 자국은 그래도 금방 지울 수 있지만 이 정도야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나중에 보기 싫어 지우려면 그 때는 이미 늦었다. 방법은 두 가지. 아깝고 미련도 많이 남지만 과감히 버리든가 어차피 그 얼룩지게 만든 사람이 나인데 그 얼룩 안고 반성하며 살든가.
그러다 문득 우리네 인간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과거에 생긴 서로의 상처가 얼룩으로 남아 지금까지 힘들다면 아프지만 더 아프기 전에 그만 관계를 끝내거나 본인의 잘못으로 생긴 상처일진대 속죄하는 마음 안고 평생 같이 살거나.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드라마 <미생>에서는 “정답은 몰라도 해답은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그래 씨처럼.” 하는 대사도 나오는데 인간관계에서는 답이 없다는 말이 답인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 말도 이토록 오래 회자되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얻은 나만의 인간관계 노하우라면 ‘인간관계’라는 말 자체에서 찾았다. ‘사람관계’라는 말을 안 쓰는 건 아니지만 ‘사람’보다 ‘인간’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요소를 그만큼 더 포함한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사람성’이 아니라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그 인간성이라는 말은 보통 부정적인 말과 호응함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는 다분히 부정적인 면을 더 많이 내포한다는 걸, 나아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까지 이르렀고 그래서 마음을 더 비우고 그것이 성급한 일반화든, 자기 합리화든 어떤 오류라 할지라도 ‘인간은 원래 그렇기 때문’이라는 마음가짐을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한다.
영화 <가족의 탄생>에서는 제일 많이 나오는 대사가 “너 나한테 왜 그래?”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하는 식의 말을 많이 하고 듣는다. 하지만 ‘왜’라는 마땅한 이유 없이, 또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 사람, 아니 인간이다. 남들 다 보는데 아무렇지 않게 무단횡단 하는 인간이 그 위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는 남들 아무도 안 보는데도 또 아무렇지 않게 자기가 버린 것 마냥 주워서 근처 쓰레기통에 버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혼자서도 그러한데 이렇게 납득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인간이라는 존재와 서로 관계 맺기가 쉬울 리 없고 답이라는 게 있을 리 없다. 한편으로는 바로 그 때문에 인간관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고, 굳이 답을 찾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다.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는 마음과 함께 나라는 인간이 먼저 어떤 어려움을 주었기 때문에 지금 저 인간이 저렇다는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오래된 관계라면 카펫 얼룩을 다시 생각한다. 이만큼 안고 살았으니 이제 그만 버릴 것인가 아니면 또 이만큼이나 안고 살았는데 그대로 둘 것인가. 어쩌면 이거야말로 햄릿의 본질적인 고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대로 둘 것인가(to be), 말 것인가(not to be)
아쉽게도 이 결정에는 노하우가 없다. 있었어도 그 선택이 맞았다고 속 시원했을 때보다 아니어서 후회막급이었을 때가 ‘인간’인지라 당연히 더 많았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지금도 나는 부러 카펫 생활을 한다. 놔뒀어도 되었던 작은 얼룩은 금방 지웠으면서 정작 얼른 지웠어야 할 얼룩은 여전히 안고 자는 내 모습에 오늘밤도 이불킥 할 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