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단칸방 신혼집에서 각자의 서재가 있는 집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북적이고 때로는 쓸쓸했던
이어령 강인숙의 64년 부부 일지
오랜만에 에세이 가운데 고급진 글을 읽으며 눈과 마음이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이 책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어령 교수의 아내인 강인숙 영인문학관장이 새로 낸 책이다. 그녀는 문학평론가이며 국문학자이기도 하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러한 손길과 필체를 느끼게 된다. 예전에 독자인 나는 국문학과가 그렇게 필요한 학과인가 생각을 했었다. 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문학이란 것이 국문학 없이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그러한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국문학과를 나온다해서 문학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국문학과를 나온 자가 어떤 자인지를 보여주는 고급스러운 에세이다.
그렇다. 읽으면서 참 좋다라는 책이 있는데 바로 이런 책이다. 문장의 구성도 좋고, 어떤 것을 피력해야 하는 지에 대해 군더더기 없이 부부의 삶을 쏟아 낸다. 이 책은 빈손으로 시작해 원하는 서재를 갖춘 집을 갖기까지 이어령 강인숙 부부의 주택 연대기다. 성북동 골짜기의 신혼 단칸방부터 이어령 선생이 잠든 지금의 평창동 집에 이르기까지, 더 나은 집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투쟁의 역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1958년부터 현재까지 떠나고 머문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함께 존재했던 부부의 삶이 강인숙 관장의 이야기 속에 행복하게 스며 있다.
에세이로 쓰여졌기에 편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면 된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엿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이어령 교수는 이미 언론과 책에 노출이 되어 어느 정도 알았지만 아내인 강인숙은 처음 접하는 분이기에 궁금한 마음이 컸다. 우리 시대의 지성인인 아버지 이어령 교수를 신앙의 세계로 이끈 딸 이민아 목사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많이 열어 보여 주었다.
남편을 존중하는 마음들이 특히 눈에 들어 온다. 동갑내기 부부인데 남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보였다.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네 것과 내 것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부부 관계이니 혹시라도 남편을 다치게 할까 봐 마지막까지 손이 떨렸다.”
“세상에 나서 내가 가장 기뻤던 때는, 그에게 원하는 서재를 만들어주던 1947년이었다.” -집 1 중에서
그리고 남편인 이어령 또한 아내에 대한 지극한 마음과 사랑이 담긴 글이 보인다.
"나는 체력이 모자라서 연탄을 갈고 있으면 아궁이로 몸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워낙 비실거리니까 연탄은 자기가 갈아 넣어주마고 신랑이 약속했다. 그는 내가 추운 한데 부엌에서 밥상을 차리는 것을 많이 미안해했다. 밥 시키려고 결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육십 년이 지난 지금도 주말에만 하는 나의 밥상 차리기를 늘 미안해해서 번번이 간단히 하자고 제안한다." p.43
그리고 저자는 그 집안의 어른들에 대한 얘기를 꺼내 놓았다. 저자가 보여준 이어령 가문의 어른들과 형제들의 모습을 보면서 독자는 명문 가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게 되었다. 물론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독자에겐 인상적이어서 그걸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그 집안의 효도 풍경"이라는 소제목에 나오는 대목이다. 긴 내용이지만 줄여서 실어 본다.
"양반다운 품위를 받쳐주던 전답이 토지개혁으로 사라지자 속절없이 몰락한 양반이 되셨지만 아버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을 철저히 지키는 효자 아들을 여덟 명을 통해 효도를 받으셨다. 아버님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법이어서 감히 토를 다는 자손이 없았다. 이 선생도 많이 어려워했으며 많이 사랑했다. [...] 아버님은 한 번도 아드님들에게 불공스러운 언사를 들은 일이 없으시다. 나는 그렇게 공경을 받는 아버지를 본 일이 없다. 그 집안에는 가부장제가 장엄하게 남아 있어서, 아드님들은 마지막까지 아버님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드렸다. 아버님은 101살에 돌아가셨는데 몸의 통증에 대해서 백 세 노인답게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톤으로 되풀이 하신다. 그러면 그 댁 아드님들은 언제나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처럼' 들어드리는 묘기를 보여준다. 그건 내가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효도 풍경이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해 듣는 건 누구나 짜증이 나는 일인데, 아버님이 마음 편하시라고 처음 듣는 분위기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팔십대의 늙은 아드님들을 보는 것은 아주 경이로운 일이었다. [...] 90년대에 아버님을 모시고 국악 공연을 보러 갔는데 공연 도중 소피 보러 일어나시자 어둠 속 여기저에기에서 손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따나나서는 것을 보고 나는 감동했다. 그건 아름다운 '효도교향곡'이었다. 그의 집에는 부권만 확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간에도 위계질서가 확고하다. 장유유서의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 안에 다섯째로 끼어 있는 남편 이어령씨를 보면 졸개와 같은데 아버님 상사시에 문상 온 동창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오는데 겨우 참았다. 그 승벽이 강한 남자가 소리 없이 그 질서에 동참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족 모임을 좋아한다. 혈육만의 원시적인 자리가 경쟁 사회의 피로를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p.80-86
집이라는 공간은 혼인을 통해 한 집안의 존재로 스며드는 것이리라. 저자는 그 집이라는 공간을 의식주의 공간에서 한 집안의 동화됨 또는 '피의 변용'이라고 부른다.
"혼인으로 인해 세대마다 피의 변용이 일어나는 것이 혼인제도의 재미다. 넌더리를 내면서 받아들인 시댁이 내 집처럼 편안해지면 그 댁 무덤에 들어가 묻힐 자격이 생겨나는 것 같다." p.95
집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저자는 삶의 흔적들을 독자들에게 매우 리얼하게 보여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다른 집의 사정과 삶의 형편을 엿보는 시간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여러 번의 이사와 집을 얻어가는 과정 속에 벌어진 삶의 파편들은 삶이 주는 다양한 면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인생을 깨닫게 해준다. 이들 부부가 집을 얻어 가는 괴정은 무엇보다 글쓰기와 책 읽기를 위한 과정이었다.
저자의 말이다. “우리 부부에게 집을 마련하기 위해 보낸 세월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나만을 위한 방’ ‘나만이 있을 수 있는 방’을 얻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집을 얻기까지는 십육 년이나 걸렸다. 그 십육 년의 세월은 보다 나은 집필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투쟁의 역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p.12
세월이 지나면서 자녀들이 출가하니 집이라는 존재는 부담이 되었다며, 그 집을 허물고 문학관을 지으려 했다. 서재를 마련하기까지 오랜 시간과 정성, 돈이 필요했다고 하는데(적어도 30억 필요/2007년 당시) 그 문학관의 이름은 '영인문학관'이라고 한다. ‘영인’은 이어령과 강인숙에서 한 자씩 가져온 말이다. 다른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닌가 했는데 이 내용을 알고는 역시 탁월한 선택임을 알게 되었다. 2007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2008년에 마무리하게 된 영인문학관은 책 제목이 말해주듯 '글로 지은 집'이었다. 즉 이십 년간의 남편의 문학에 대한 대가가 거기 모두 들어가 있다고 말한다. 그 건물은 그(이어령)의 원고지 매수의 가시적인 형상이었던 것이다.
십육 년 동안 거쳐간 여덟 곳의 집 이야기로 구성된 이야기는 독자들 마음에 더 크게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새기게 만들어 준 책이 되었다. 정말 이어령이라는 분은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아내 또한 좋은 배우자였음을 알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이어령 선생의 서재. 가을쯤 일반에 공개될 예정이다. 사진=조준우 기자
이 책의 한 문장
남의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하늘 옷 같은 모든 비상하는 것들과 인연을 끊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부터는 취향이나 꿈이 아니라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이를 낳는 일을 두려워한다. 한 생명을 책임지고 키울 자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부모의 길은 무겁고 벅차다. p.205
이어령 씨의 장엄한 반세기가 평창동 499-3에 담겨 있다. 머지않아 그이와 나는 걷는 일이 어려워질 것이다. 머지않아 그이와 나는 쓰던 글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사는 일에서 손을 놓을 것이다. 신이 허락한다면 우리는 이 집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평창동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다우니 어느 철에 가도 무방하지만, 이왕이면 송홧가루가 시폰chiffon 숄처럼 공중에서 하느작거리는 계절이면 좋겠다. _‘집8. 평창동 이야기’에서 p.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