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을 시작했던 나는 그때의 힘들었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커튼 대신 블라인드가 도입되어 유행하기 시작할 무렵 나는 블라인드 제조업에 뛰어 들었다. 블라인드를 제조하여 동네의 커튼점에 납품을 하기도 하고, 간혹 공장이나 병원 등의 대규모 발주는 직접 시공까지도 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일반 가정집의 블라인드 설치 주문도 심심찮게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공구를 챙겨 들고 직원을 따라 나서곤 했다.
주로 대낮에 방문하는 일이라 마주치는 사람은 그집의 안주인인 아줌마가 대부분이고, 그 때마다 아줌마를 상대하는 직원의 능수능란함에 감탄을 하곤 했다. 직원은 나이에 상관없이, 또는 상대방의 학식이나 지위를 무시하고 반말에 가까운 어투로 편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처음에 나는 그런 직원의 말투를 지적하며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오히려 내가 잘못되었음을 시인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상식으로는 상대방에게 최대한 공손하고 교양있는 말로 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와 달랐다. 격식을 갖춘 직원의 말에 상대방은 몹시 부담스러워 할 뿐만아니라 전처럼 원하는 것을 편하게 부탁하지도 못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일순 혼란스러웠다. 당시에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나는 직원과 시공을 나가는 일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깨닫게 된 것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에 있어 나의 학벌(?)이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 벽을 세우고, 구분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답지 않은 먹물근성이 내 몸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정작 나만 모르고 있었다. 고졸학력의 직원으로부터 얻게 된 소중한 교훈. 때로는 위엄, 격식, 교양이라는 가면을 벗어 던져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음을 가슴 깊이 깨달았다.
'소통의 부재'라는 말을 곳곳에서 듣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그것이 비단 대통령에게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나와 남을 구분하기위한, 나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려는 그 '먹물근성'의 가면은 이제 그만 벗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