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은 아니지만, 나만큼 많은 알바 경험을 해 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기억나는 것만 떠올려도 이렇다.
대학생이 가장 흔하게 했던 개인 과외, 막노동은 기본적으로 거쳤고, 사당동에서 리어카 과일행상을 했고, 지금은 사라진 해태 농수산(주) 대리점에서 배달 및 세일, 그리고 석사학위 논문대행을 했었다.
4년제 장학생으로 입학했었기에 등록금 걱정은 없었지만 둘째 형의 등록금 및 용돈에 부담스러워 하시는 부모님을 지켜볼 수 없었기에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다.
그 당시 대졸 초임 월급이 40만원 정도였는데, 나는 그 몇 배를 한 달에 벌고 있었다.(자랑이 아닌 생존의 문제였기에, 나에게는 남과 비교할 여유도 없었다.)
밝힐 수는 없지만 잡지사에 가끔 글을 쓰는 일도 있었다. 물론, 전문적 글쓰기가 아니라 순전히 알바 개념이었다.
그 중 기억나는 것들을 간략히 적어보면, 서울대 신소재 연구소(5층 건물)의 외벽을 로프를 타고 외장 타일을 닦은 일, 불법적인 일이었지만 대학생 신분으로 야간 대학원에 다니는 사람들의 석사 논문을 20여 편 썼던 일(지금 생각해도 직장을 다니며 논문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논문을 의뢰한 사람들도 다들 그리 생각했고, 그분들은 대학원을 다니는 목적이 인맥과 학벌이 주였다.)
당시에는 의뢰인이 논문 작성에 필요한 모든 경비를 부담하고, 초고를 넘길 때 120만원을 주었으니 꽤나 괜찮은 알바였다. 대부분은 논문 심사 몇 개월 전에 의뢰하지만, 마지막까지 본인이 해결하려다 심사 1주일 전에 제목만 들고 와서 써달라는 의뢰인을 만난 적도 있었다. 나는 이틀을 준비하고(필요한 자료복사), 5일을 잠도 잊은 채 매달려 그 임무를 완수하기도 했다.(결국 나는 그 논문을 써주고 이틀을 병원에서 보냈다.) 돌이켜 보면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많은 공부를 가능케 했다.(논문 한 편을 쓰려면 관련 논문을 최소한 20편 이상 읽어야 쓸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대학 도서관을 방문하면 그때 썼던 나의 논문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꽂혀있는 것을 보게된다. 자랑스럽다는 느낌보다는 씁쓸하다.
사당동에서 리어카 행상을 할 때는 새벽 5시에 사당동 과일 도매시장에서 필요한 과일을 떼어 리어카에 진열하고, 종일 리어카를 끌고다니며 큰소리로 외쳐 물건을 팔았다. 여러 에피소드가 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겠다.
행상은 가끔 과천의 서울대공원으로 향했다.
서울대공원 앞에서 특별한 날(특히 어린이 날)에는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마른 오징어를 구워 팔았다.
지금은 모두 지나간 추억이지만 나는 참 바쁘게 살았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용돈을 쓰고, 형의 등록금을 보태고, 남은 돈을 저축하여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었다.
요즘은 등록금 천만원 시대라 한다. 공부보다는 알바에 목숨 거는 젊은이들을 보며 나의 대학시절을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며 열심히 하라고 말할 수 없다.
힘겨웠던 그날은 마음 한 켠에 돌처럼 굳어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