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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동의 탄생

[도서] 현대 중동의 탄생

데이비드 프롬킨 저/이순호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예전에 중동 호텔에서 일하시다 오신 분이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서로 민족과 종교의 우수성을 늘어 놓는 사람이 너무 많고 이야기도 길고 내용도 잘 이해가 안 되고 상관들,

손님들이라 이야기를 피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

그러고 보니 나도 잘 아는 것이 없다. 고대 문명 발상지, 이슬람의 나라들, 석유가 나는 곳, 이해할 수 없는 테러가 계속 일어나는 나라, 이것이 내가 알고 있는 중동의 나라들이다. 그리고, ‘ 1차 세계대전 시 오스만투르크는 독일 편에 가담하는 바보스런 결정을 했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중동이라는 서아시아의 복잡한 그들의 근대사를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처럼 제국주의로 인한 아픔을 공감할 수 있었다. 아직 근대화 되지 않은 시점에 제국주의에 희생이 된 근대사를 아주 리얼하게 서술 해 주었다. 그 아픔이 아직도 간직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같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통합이 쉬우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도 그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 가고 있었는데 서구 열강에 의하여 나름의 정체성을 무시당하고 지금의 현재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라는 것을, 힘의 논리에 의해, 이익을 쫓는 무리들에 의해 아픔이 마음 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에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중동관련 보다 폭 넓은 이해를 위해 관련 서적을 찾아 읽어야겠다

본문요약

 

발간 20주년 기념 판본에 부쳐

중동도 물론 1 세계대전으로 변한 지역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그것이 제국주의라는 공격을 받은 것이다. 공격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그러나 독자들도 책을 통해 알았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단순하고 경험도 부족한 시대를 살았다. 따라서 그들을 판단할 때도 점을 감안해 너그러운 태도로 정상을 참작하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922 타결을 이끌어낸 사람들이 제국주의 정신에 충만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아는 유일한 세계가 제국들이 세계였고, 그러므로 그에 대해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후 중동의 재건을 책임진 정치인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했다는 역시, 1세기 전이었던 당시에는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영국 관리들이 당시의 아랍은 아직 자치 ? 다르게 표현하면 법률에 따른 자유 민주주의 헌법 체제 ?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 또한, 물론 그것은 쇼비니즘적 주장일 수도 있겠지만 최근의 증거물로 보면 말이 반드시 틀리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도 만든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2004 4 3일일자) 실린 기사도 그것과 관련해 참조해볼 만하다. “아랍 연맹에 가입된 22 국가들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일관되게 소수에 의한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명의 아랍 지도자도 선거 조용하게 쫓겨나 적이 없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1922년에 타결과 관련해 영국이 중동에 공군기지와 다른 군사 기지들을 보유한 것도 2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이라크, 이란, 팔레스타인, 시리아-레바논, 이집트 중동 전역에서 친나치 독일 세력을 억제햐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영국 입장에서 보면 그것도 충분히 1922 타결의 유효성을 입증해주고, 그것의 중요성을 보여준 요소로 여길 만했을 것이다

 

들어가는

1922년의 타결을 제시하는 외에 나는 그에 대한 세간의 불만(중동을 다른 식으로 재편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도 했다. 무렵 영국정부가 중동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킬 해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만 해도 사실이 아이었다.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영국은 그와는 전혀 다른 일을 도모했을 뿐이다. 키치너와 그의 대리인이었던 마크 사이언스에게 중동문제는 백여 이상을 끌어온 문제, 다시 말해 프랑스의 경계선을 중동의 어디에 긋고, 그보다 중요한 러시아의 경계를 어디데 설정해야 하는지의 문제였다는 이야기이다

 

9.키치너의 부관들

사리에는 어둡고 직업적 야망만 하늘을 찔렀던 중동의 영국 관리들은 이렇듯 아랍인들이 유럽의 통치를 원한다고 믿었고, 그들의 이런 오판이 결국 키치너의 부관들을 부추겨 시리아의 지배권을 탐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사리에 어둡고 출세욕만 강하기는 현지의 프랑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시리아의 지배를 원했으니까

 

10.키티너 이슬람 공략에 나서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정부와 정치를 비롯한 삶의 모든 영역이 율법의 지배를 받았으므로 오스만 술탄과 메카의 아미르 같은 수니 무슬림들의 시각에서 보면 칼리프는 율법의 옹호자였고, 따라서 모든 곳에 그의 지배권이 미쳤다. 카이로의 영국인들이 오해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칼리프가 기도회의 지도자인 것에 그치지 않고, 통치자 전쟁의 지도자, 다시 말해 군주라는 사실도 몰랐다.

키치너의 측근들은 그들이 이슬람권에 대해 안다고 믿은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다른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었다. 이슬람권의 불화와 분열상의 정도를 가볍게 것이었다. 점에서 이슬람의 극단적 청교도 운동인 와하브파의 지도자 이븐 사우드에게 수니파인 메카 지배자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라고 요구한 키치너의 계획은 현실적이지 못했다. 수십 개로 쪼개진 이슬람의 종파들이 그랬듯, 둘도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이다

 

35.예루살렘에서 크리스마스를

당시 여건상 약속의 실행이 가능한지, 실행 가능하다면 현지의 영국 장교들도 그것을 이행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숙고 없이 중동정책을 마련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36.다카스쿠스로 가는

그들은 칼리프직의 힘을 믿었지 아랍 민족주의를 믿은 것이 아니었다. 후세인이 칼리프직을 원한 것도 그들 자신을 위해서였다. 동방에서 민족주의는 무의미하고, 종교가 모든 것이라는 것이 그들 생각이었다

38.갈림길

레닌도 상황을 잘못 넘겨짚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은 식민지 획득이 목적인 제국주의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전쟁 때문에 제국주의가 야기된 측면이 컸다. 교전국들이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여 자신들이 입은 심각한 손실을 만회하려 했던 것이고, 그런 그들에게 러시아제국의 붕괴는 충분히 답이 만했던 것이다

 

41.배신

윌슨의 연설 내용이, 결과적으로 평화회의에서 일어날 일을 가장 정확하게 예측한 족집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민족과 지방들이 “마치 체스의 졸처럼 나라 나라의 손바닥 안에서 움직이고, 협정들 또한 “관련 지역주민들의 이해관계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윌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적 영향력이나 지배력을”행사하려는 “경쟁 국가들의 타협이나 조정”을 통해 타결되었다는 의미에서다. 심지어 미국마저도 윌슨이 설정한 노선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55.영국 적들의 실체

영국이 중동에서 직면한 것은 독립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영국의 통치에 저항해 지역민들이 자생적으로 일으키기도 일련의 끝없는 폭동들이었다. 따라서 외부 세력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외부세력을 향한 폭동들이었다.

<타임즈> 기독교 유럽 국가들의 통치에 반대해 중동의 무슬림권이 일으킨 다수의 봉기들에 나타난 공통점을 분석한 내린 결론은 “유럽의 나라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문제”라는 것이었다.

<타임즈> 영국이 벌여놓은 방만한 사업을 가장 위험한 요소로 파악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국내와 경제에 있었는데도, 돈을 투자하여 국내 경제와 사회를 활성화하는 일은 소홀히 중동에만 돈을 쏟아 부어 나라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57.윈스턴 처질, 중동문제의 주도권을 잡다

처질은 그로부터 열이틀 뒤에는 국내 문제에서 외교정책으로 방향을 돌려, 영국의 중동정책을 가장 폭넓은 시각으로 비판한 논설을 내각에 다시금 배표했다. “불행한 사태가 전개되어 영국은 지금껏 중동에 영향력을 갖고 있는 세력 ? 러시아, 그리스, 튀르크, 아랍 ? 보조를 맞추었지만, 적대세력과 마주했을 우방을 얻기 위해서라도 현지의 세력들을 갈라놓는 정책”을 취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지리적 우연 때문에 그의 정책과 앨런비의 정책의 상이점이 하필이면 1921 카이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것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사람의 정책 간에는 차이나 없었다. 정책 모주 아랍권의 지배 방식에 대한 영국의 일방적 결정을 나타낸 것이었고, 아랍 지도자들은 어느 것도 수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에는 쿠르드족 외에도 정체성이 뚜렷하고 이런저런 요구를 하여 영국을 골치 아프게 하는 다른 종족들이 있었다. 특히 전시에 연합국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터키 본거지에서 쫓겨나 오갈 없이 떠돌던 북서부 지대의 아시리아교파(네스토리수스교파) 기독교도들이 문제였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 난민 종족들에게 카이로 회의가 해줄 있는 일은 없었다

 

59.연합국의 분열

이랬던 중동이 1915년 애스퀴스 정부가 러시아의 영토적 요구를 들어준 뒤로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러시아가 오스만제국의 북쪽 지역을 차지하고-키치너에 따르면- 영국이 남쪽의 아랍어권을 차지하기로 합의한 것인데, 그러자 프랑스가 들고 일어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이런 식으로 유럽 국가들은 상대방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중동에서 너도 나도 영토 쟁탈전을 벌였다

유럽 국가들의 동맹이 와해되는 조짐을 보인 것은 종전 무렵이었다. 전전에 영국과 국제 협력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나라들이 세계정치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것도 와해를 부추긴 요인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영국의 이전 동맹국들-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이 처음으로 충돌하게 된 주요인은 역시 종전 무렵의 중동문제에 있었다. 중동정책으로 야기된 불만이 세계 다른 지역의 정책도 동맹국들과 공통의 기반을 조성하여 펴나가려고 한 영국에 찬물을 끼얹었던 것이고, 그것이 동맹이 와해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60.그리스의 비극

1919~1920 동안 로이드 조지는 자신의 힘으로 어디에서 나왔는지조차 잊고 지낼 만큼 기고만장했다. 자신이 관장만 했지 지배하지는 못한 각종 동맹과 연합들이 그의 힘의 원천이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지낸 것이다

 

61.중동문제의 타결

유럽인들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최소한 100년 전부터 시기상의 문제일 뿐 중동이 언젠가는 열강의 몇몇 나라들에 점령되리라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영토분할 과정에서 행여 자기들끼리 파멸적인 자중지란을 벌이게 되는 것이었다.

쿠웨이트,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국경도 이븐 사우디와 협정을 체결하여 1922년에 확립되었다. 영국은 이렇듯-프랑스와 러시아가 그들의 중동 세력권에서 했던 것처럼-중동의 자국 세력권에 나라들을 세우고, 그곳들의 지배자를 임명하며, 국경선들을 확정했고, 그 대부분을 1922년 무렵에 처리했다

유럽 국가들이 오래전부터 하려고 했던 일, 중동 민족들의 정치적 운명을 그들 손으로 결정짓는 일은 일단락되었으며, 그것을 구체화시킨 것이 이른바 1922년의 타결이었다

그래도 남는 의혹은 다른 지역과 다를 바 없이 중동에도 과연 유럽이 깊숙이 혹은 영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중동은 세계적인 몇몇 종교와 고대문명들이 태동한 지역으로서 그 자긍심이 대단한 곳인데다, 유럽이 그곳에 도입하려고 한 변화들 또한 정책에 오랜 기간이 걸리는 복잡한 구조를 지닌 것들이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에 의해 형성된 유럽이나, 르네상스가 시작된 유럽에 의해 형성된 아메리카 모두 그것이 실현되기까지 수백 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게다가 1922년 무렵 서유럽은 그런 거창한 일을 벌일 만한 분위기도, 여건도 조성돼 있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유럽이 오랫동안 기다리다 중동에서 벌인 제국주의 모험은 때늦은 것이었다. 당시의 유럽은 그것을 행할 만한 재원도 없었고 그 일에 전력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다

1차 세계대전 초만 해도 식민지 획득 의지를 표명하는 것은 그럭저럭 용인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윌슨의 미국과 레닌의 러시아가 반제국주의 수사를 이용해 유럽의 제국주의를 공격한 뒤로는, 세인들의 생각과 정치적 표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종전 무렵 영국사회에서는 제국주의에 담긴 이상주의적 논거(낙후된 지역에 선진 문명의 혜택을 보게 해준다는 것)는 비실제적인 것으로, 실리적 논거(영국제국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는 진실이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상황이 되었다. 제국주의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모든 재원을 쏟아 부어, 결국에는 사회를 고갈시키는 값비싼 희생으로 보게 된 것이다

비행기와 장갑차만 있으면 현지인들의 저항을 언제까지고 물리 칠 수 있을 것이라는 처칠의 허약한 가설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점에서 그 가설은 영국 정책의 오랜 특징이었던, 중동에 대한 과소평가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영국의 관점에서 볼 때 1922년의 타결은 그것이 발효될 때부터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거기에 담긴 중동정책이 1915년부터 1917년까지 영국정부가(주로 마크 사이크스를 매개자로 이용해) 뼈대를 잡은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이후 정부도 교체되고 영국 관리들의 사고방식도 달라져 1922년 무렵에는 새로운 정부가 원하는 사항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22년 타결이라는 특수성이 그런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영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중동의 오래된 질서를 파괴하고 이집트에서 이라크까지 모든 지역에 군대, 장갑차, 전투기들을 배치해놓은 채 그들 스스로도 더는 믿지 않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1922년의 타결을 중동에 부과하여 초래된 자명한 결과였다는 이야기다

중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유럽 국가들이 재편을 맡았기 때문

    영국과 프랑스가 왕조, 국가, 정치시스템만 구축해 놓고 그것들이 지속될 수 있는 대책 마련에는 소홀한 탓이었다

전시와 종전 뒤 영국과 연합국은 중동의 구질서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숴놓았다. 아랍어권 지역에서의 오스만 체제를 회복 불가능하게 파괴시킨 뒤 그 자리에 나라들을 세우고, 지배자들을 임명하며, 국경선을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국가시스템 비슷한 것을 도입했으나, 그것에 반발하는 현지인들의 저항까지 죄다 물리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보니 1914~1922년 사이 영국과 연합국이 취한 조치는 유럽의 중동문제만 종식시켰을 뿐, 중동의 중동문제는 오히려 새로 불거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1922년 초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한 내용에 따라 그 즉시 모습을 드러냈거나 혹은 종국에는 모습을 드러내게 될 나라들(이라크, 이스라엘, 요르단, 레바논)의 규모와 경계는 물론이고 그 나라들의 존립권 자체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내포돼 있다는 점이었다. 그곳이 지금까지도 국가의 생존을 위해 빈번히 투쟁을 벌이는 세계적 분쟁지역이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분쟁은 점차 심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쿠르드족의 정치적 미래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정치적 운명과 같이 독특하고 해결 불가능한 사안들의 저변에, 중동에 이식된 유럽의 현대적 정치시스템-특히 세계 모든 지역을 시민성에 기초한 세속국가들로 분류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이 중동이라는 생소한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본질적 문제가 내재된 있는 까닭이다

유럽의 정치 가설은 그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최소한 그 중 하나, 세속적 문민정부에 대한 현대적 믿음만은, 정치를 포함해 삶의 모든 양상을 지배하는 이슬람 율법을 1,000년 넘게 신봉해온 사람들이 사는 중동에서는 이질적 존재였다

종교적 이유로든 그 밖의 또 다른 이유로든, 1922년의 타결 혹은 그것의 토대가 된 근복적 가설에 맞서 지속적으로 저항하는 것이 중동 정치의 특징이 된 것도 그것(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해가 부족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중동에는 합법성에 대한 인식-게임의 규칙이 없다는 것-이 없고,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믿음도 없으며, 경계지 내에서는 어느 곳이든 나라로 부르면 나라가 되고, 지배자를 칭하면 지배자가 되는 곳이었던 것이다. 그 점에서 연합국이 제아무리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오스만제국의 계승자들을 들어 앉혔다고 주장한다 한들, 중동에는 아직 술탄의 진정한 계승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유럽이 서로마제국 멸망 후에 닥친 사회정치적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무려 1,5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국가라는 정치조직을 갖추는 데 1,000, 어느 민족이 국가를 가질 자격이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 다시 근 500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경쟁적 전사 집단들이 습격과 투쟁을 반복하는 가운데 문명이 살아남고, 교회 혹은 국가. 교황 혹은 황제로 통치의 주체가 바뀌며, 카톨릭과 프로테스탄스가 기독교계에서 우위권 경쟁을 벌이고, 제국, 민족국가, 도시국가가 백성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다투며, 부르고뉴 공국에 속하는지 프랑스에 속하는지 문제를 놓고 수백 년간 진력나는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패자들이 종종 몰살을 당하기도 한 디종의 경우처럼, 제후와 왕 사이의 피 터지는 투쟁의 과정을 거친 끝에 서로마제국 멸망 1,500년 뒤인 19세기 말 독일과 이탈리아가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서유럽은 비로소 구로마 지도를 그럭저럭 대체할 만한 지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옮긴이의 말

카에다의 잔당에 지나지 않던 아이에스만 해도 갑작스레 생겨난 조직이 아닌 중동의 역사가 켜켜이 쌓인 데서 나온 결과물인데다, 지금의 문제도 어찌 보면 지난 80~90 동안 지속해온 중동 분쟁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점을 고려할 ,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현재 처해있는 딜레마도 결국 중동에는 본질적 요인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 항구적이고 일관된 정책을 시행하기 어려운 점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구 제국들이, 20세기 초에 정점을 찍은 뒤로 제국주의의 해가 지는 줄도 모른 힘과 문화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중동에서는 무엇보다 종교와 부족이 우선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도외시했고, 무지의 소산이 바로 현재 서방이 맞고 있는 딜레마인 것이다

<현대 중동의 탄생> 원제는 <모든 평화를 끝내기 위한 평화>. 제목처럼 책은 평화를 위한 모든 타결이 종국에는 평화를 끝장내는 타결이 내력과,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여과 없이 기록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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