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시대의 산물이었다. 지금을 살고 있으면 지금을 철학하라
원초적인 것에 더 친밀함을 느낀다.(?) 몸에 원초적인 것과 뇌에 원초적인 것은 무엇인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나의 사회 생활 첫 번째 목표는 독립이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부정적인 늪에 빠졌다. 늪에서 건져 준 것은 공부였다. 나보다 더 치열했던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여 듣고 다시 현실과 마주하며….
돌고 돌아 무기력과 안락함에 안주하는 못난 나, 현재와 맞닥트릴 그날이 오기를…
본문 요약
개정판 서문
앎이 늘어갈수록 내 자유가 공동체의 자유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개인적인 삶의 의미가 우주의 넓이로 확장되는 것이 바로 완성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대의 병은 뜻있는 개인으로서의 내가 발견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점에서 공적이다
이론이나 학술보다는 ‘진영’의 정치 공학이 우선이다. 이렇게 되면 정련된 정책이 집행되지 못할 뿐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진영만 바꾸는 일이 반복되고, 결국 더 높게 오르는 역사의 진보는 더디다. 학술과 문화가 국가 운용과 별 상관없이 존재한다. 삶과 지식이 분리되어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 지식을 기능적인 이해의 대상으로만 삼지 내 삶에 충격을 주는 송곳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약하다. 높은 수준의 지식을 송곳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철학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 만든 매우 고효율의 장치다. 철학과 비슷한 높이에 수학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동안 철학을 추상적인 체계로서의 이론으로만 간주해 왔다. 철학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수입하였기 때문이다. 철학이 생산되는 순간은 육체적이고 역사적이다. 거기에는 피 냄새, 땀 냄새, 아귀다툼의 찢어지는 음성들, 긴박한 포옹들, 망연 자실한 눈빛들, 바람 소리, 대포 소리가 다 들어 있다. 망연자실한 눈빛들 속에서, 쓸쓸하지만 강인한 눈빛을 운명처럼 타고난 사람이 역사를 책임지려 앞으로 튀어나가며 인간으로서 발휘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시선을 화살처럼 쏠 \때 철학 이론이 태어난다. 이처럼 철학 생산 과정에서는 역사에 대한 치열한 책임성과 헌신이 들어 있다. 우리가 배우는 플라톤, 데카르트, 칼 마르크스, 니체, 공자, 노자, 고봉 기대승, 다산 정약용이 다 이러하다
기준을 신념처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을 모두 참과 거짓이나 선과 악으로 따지기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세상이 기준에 맞느냐 맞지 않느냐가 중요하다
구체적인 현장이 펼쳐지고 나서 윤리가 있다. 주도권을 가진 선진국에서는 다 그렇다. 거친 야성이 먼저 있고 나서야 순하고 질서 잡힌 행위가 요청된다. 드론 시장을 윤리(규제)가 필요할 정도로 키워놓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것은 윤리적(규제)으로 다루다가 드론 시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 윤리적 주도권보다 시장의 주도권이 더 세고 중요하다. 윤리는 시장 성숙 다음의 일이다. 이 말이 나쁜 말로 드리면, 전략적이거나 선도적인 높이를 아직 모르거나 거기에 서본 경험이 없어서다. 선한 규제가 악을 생산한다. 이런 맥락에서 노자도 지켜야 할 것이 적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짐승처럼 과감하게 덤비는 것이 윤리적 인간이 되는 것보다 훨씬 실속 있다. 짐승처럼 덤비면 짐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인간이 된다. 너무 인간적이면 자잘한 인간으로 남는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활짝 열기 위해 마음속에 야수를 한 마리 키우자
초판 서문
이 책은 2015년 건명원에서 한 5회의 철학 강의를 묶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철학 수입국으로 살았다. ‘보통 수준의 생각’은 우리끼리 잘하며 살았지만, ‘높은 수준의 생각’은 수입해서 산 것이다. 다른 사람이 한 사유의 결과를 숙지하고 내면화하면서도 스스로 ‘생각한다’고 착각해왔다. 수입된 생각으로 사는 한, 독립적일 수 없다. 당연히 산업이든 정치든 문화든 종속적이다. 이런 삶을 벗어나고 싶다
1강 부정 否定: 버리다
01 명 明 ? 대립의 공존을 통한 철학적 차원의 사유
明 자에는 日와 月이 공존하고 있다. 대립된 두 존재가 개념적으로 하나가 된 것이다. 해를 해로만 보거나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을 ‘知’라고 하는데, 건명원의 ‘명’자는 그런 구획되고 구분된 ‘지’를 뛰어넘어 두 개의 대립 면을 하나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극단적인 이념 대립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대립을 품어 안는 내적 공력을 키워 지속적으로 변증법적 상승을 해야 한다
여기서 내적 공력이란 ‘명’자처럼 대립된 해와 달을 동시에 품는 능력, 다시 말해 ‘대립의 공존’을 장악하는 힘이다. 우리가 이 대립의 공존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름답고 좋기 때문이 아니라 우선 그것이 실용적이고 미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 말로 대립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비로소 우리의 수준을 한 단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꿈쩍 않고 정체되어 있는 우리 사회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갖게 된다
우리 생존에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바로 건명원이 탄생한 계기다
통상 우리는 어떤 하나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이론 체계나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만 묻고 따지는데, 더 중요한 것은 내용이야 각기 다르더라도 그런 내용을 산출하는 철학적인 높이의 시선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철학은 하는 목적은 철학적인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직접 철학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02 패 敗 ? 서양에 의한 동양의 완전 패배
복수의 결기가 없는 민족은 피해를 가한 상대를 저주하거나 증오하는 것으로만 세월을 보낸다. 반면에 살아 있는 민족은 저주나 원망에만 머물지 않고 패배의 근원을 탐색하고 조용히 힘을 기르며 최소한 다시는 굴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이런 자세에서라야 진정한 용서와 평화도 가능하다
배후의 그 힘은 무엇인가? 비러 정치제도이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서양의 강점은 단순히 과학기술 문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력한 과학기술 문명을 가능하도록 한 배후의 힘, 즉 정치제도에 있었다. 이때부터 중국인들은 과학기술을 넘어 서양의 제도를 배우려는 노력에 집중한다. 그래서 1898년부터 다시 변법자강운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병법자강운동이 실패했다고 해서 거기에서 바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제도 너머의 더 심층적인 힘을 찾는 데 주력했다. 어떤 시도도 실패로만 마무리되는 법은 없다. 그 시도 자체가 이미 성공을 부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실패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동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경험된 동력은 실패의 암울한 풍경 속에서도 꿈꾸는 자들을 더 심층적이고 새로운 곳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를 넘어서려는 그 어떤 시도라도 감행해야만 한다
이전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몰랐다거나 가지지 못했었다는 것보다도, 서양으로부터 당한 치욕을 극복하고 새로운 부강의 시대를 향한 개혁의 과정에서 ‘철학’이 가장 근본적인 기능을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03 복復 ? 서양을 배우다
내 것의 전면적인 부정은 내게 필요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효율적이고 핵심적인 방법이다. 서양의 월등한 과학기술 문명의 출처가 어디인지 파고들었더니 그것은 그들의 월등한 정치제도에서 왔고, 그들의 월등한 정치제도는 또한 그들의 월등한 사상, 문화, 철학에서 왔다고 하니, ‘구국구망’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궁극의 지점인 그들의 사상, 문화, 철학을 철저하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평민들끼리 모여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나라를 만든다는 자각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이런 높이에서 하는 결정이나 선택이 바로 철학적인 시선이다. 자기가 처한 조건 속에서 일상의 잡다함이나 자질구레함 속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지배할 더 높은 단계에서의 결정을 감행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철학적 시선이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그 이전과 전혀 다른 미국식의 산업 생산 구조를 갖게 된다
어느 순간 미국인들은 독일 관념론적 시각으로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자각한다. 이 와중에 터진 것이 남북전쟁이다. 이 남북전쟁을 기화로 새롭게 전개되는 미국식 산업 구조와 자본주의를 지배할 새로운 철학으로의 이행이 시도되는데, 그 결과 ‘실용주의’가 탄생했다
보통 어느 하나의 철학적 내용에 몰두해서 그것이 철학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 빠지기 쉬운데, 우리에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철학적 차원의 시선이다. 그리고 철학적 차원의 시선에서 철학적으로 자각해서 자신의 운명을 끌고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철학이자 철학적 삶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미국은 철학적인 차원에서, 다른 말로 하면 전력적인 차원에서 상당히 잘 형성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미국의 강한 국력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 강대함이 영원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철학적이고 문화적인 높이에서 국가의 진로가 결정되어야만 진정으로 독립적인 삶이 보장된다. 그 독립적 결정에서라야 지속적인 풍요와 번영이 보장된다. 독립적이지 못한 곳에서 형성된 종속적 풍요와 번영은 항상 흔들리기 마련이다. 주도권을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짜진 판 안에서 사는 전술적인 사고와 달리,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다. 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판을 새로 짜는 일에 대한 사고가 바로 전략적이다. 전략적으로 형성된 판 안에서 다른 여러 가지 종속적인 변수들을 다루면서 하는 행동들을 전술적이라고 한다
철학적인 단계로 진입하지 못한 단계, 즉 창의성과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는 단계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이미 나와 있는 것들을 습득해 따라 한다. 그렇다면 철학적인 높이로 상승한 단계의 사람들은 어떠할까? 바로 전면적인 부정을 이야기한다. 전면적인 부정이 새로운 생성을 기약한다. 새로운 생성은 전략적인 높이에서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여는 일이다.
스스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결정하지 못하는 한 종속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종속적인 삶을 사는 한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스스로의 삶을 꾸리거나 효과적으로 사회를 관리하지 못한다
시선의 높이가 생각의 높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며, 삶의 높이가 바로 사회나 국가의 높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진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서기가 그렇게 어렵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 기준의 시선을 교체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전쟁이나 침략이 도덕적인 선악의 차원에 있는 것인지의 여부가 아니라 훨씬 더 중요하게는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그것들의 발생이나 억제를 자기 통제하에 둘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당했던 치욕 자체를 치욕으로 응시하고 전략적인 차원에서 대응하는 일을 제대로 해오지 못했다. 저주하고 한을 품는 일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이상 치욕을 당하지 않을 구체적인 방안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면적인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04 력 力 ? 뮨화, 사상, 철학의 힘
하나의 지식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해서 재사용하거나 거기에 몰두하고 빠져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지식을 소유하거나 효용성을 따지는 대신 그 지식 자체의 맥락과 의미를 따지고, 그것이 세계 안에서 벌이는 작동과 활동성을 보려고 한다. 철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둘 중 후자가 더 철학적 시선에 가깝다. 컴퓨터가 발명되자 어떤 사람은 그 컴퓨터를 사용하고 소유하는 일에 빠지지만, 어떤 사람은 컴퓨터의 사용보다도 그 컴퓨터로 인해 전개될 새로운 변화의 맥락이나 달라질 사회의 흐름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역시 후자가 더 철학적 시선에 가깝다
다시 말하면 철학이란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격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 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한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큰 철학자들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닮기 위해서 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시선으로 자기처럼만 산 사람들이다. 노자도 공자도 칸트도 헤겔도 모두 ‘자기처럼’ 산 사람들일 뿐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세계에 철학적으로 접근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배우는 사람들은 칸트를 배우면 칸트처럼, 노자를 좋아하면 노자처럼, 공자를 좋아하면 공자처럼 살아보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철학자로 인식되고 있는 조선의 많은 철학자들은 사실 철학자가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주희 (주자)를 닮으려고 안달이었다. 조선의 종속성은 이런 태도에서 기인한다.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조선의 철학자”들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종교인이 철학적이기 어려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레고는 원래 ‘아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붙들고 있었는데, 그 컨설팅 회사의 조언에 따라 기존 질문을 다음과 같은 철학적 질문으로 바꾼다. ‘아이들에게 놀이의 역할은 무엇인가?’,’아이들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어떤가? 질문이 철학적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레고는 이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아이들을 직접 관찰하고 인터뷰하고 따라다니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한다. 아이들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즐거움도 좋아하지만, 오랜 시간을 투자하여 어려운 기술을 익히고 이를 자랑하는 것에서도 큰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경제적이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효율적이기 때문에 힘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을 활용할 줄 알면, 세계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능력이 커진다
수입된 기성품으로서의 철학 이론을 진리로 수용하는 사람들은 시선이 구체적인 현실에 닿지 않는다. 현실적인 세계가 아니라 수입된 이론을 진리로 간주하기 때문에 시선은 온통 그 이론 체계에만 집중된다. 이념과 신념의 집행자로 존재하지 그것들의 생산자로 우뚝 서려는 시도를 못 한다. 당연히 믿고 있는 이면을 구체적인 세계에 부과하려고만 하지, 구체적인 세계 속에서 새롭고 적절한 전략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유나 활동의 범위가 이론을 품고 있는 자기에게로 축소된다
철학 생산자들은 모두 시대와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예민하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모든 철학은 다 시대의 자식들이다. 시대를 건너가는 가장 높은 차원의 시선이 바로 철학이다. 모든 철학은 다 각기 그 시대를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담겨 있던 바람 소리나 시장의 소란이나 땀 냄새들은 모두 빼버리고 관념적인 논의나 도덕적인 주장들만 받아들여 교조적으로 내면화한다
2강 선도 先導: 이끌다
01 태 胎 ? 새로 만들다
중진국까지는 선진국의 선도력을 따라가거나 그 선도력을 확대 심화시키는 역할을 주로 한다. 그에 비해 선진국은 독립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으로 세계를 선도하는데, 이 독립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의 주요 자양분이 바로 철학적 시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상의 기능적인 관심에 빠져 있을 때, 거기에서 슬그머니 이탈해 흐름 자체에 궁금증을 가지면서 시작된다. 대다수가 공유하는 관념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이 호기심은 사실 이 세계의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은 자신만의 것으로, 매우 고유하고, 비밀스럽고, 사적인 내면의 활동이다. 호기심이 발동할 때, 즉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의 힘이 발동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자기에게만 있는 고유한 힘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이런 사람이 비로소 독립적 주체다. 이런 독립적 주체들이 사회의 주도 세력이 되면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힘이 강해지고, 결국 그 사회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고 부단히 혁신하며 나아간다.
독립적 주체들은 대답하는 일에 빠지지 않고 질문을 시작한다. 대답은 주로 ‘우리’ 속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질문은 ‘우리’로부터 이탈한 독립적 주체들만이 할 수 있다. ‘대답’이 진행되는 구조를 보자. 대답이란 이미 있는 지식이나 이론을 그대로 먹어서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다시 뱉어내는 일이다. 이때는 누가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빨리 뱉어내는가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이런 구조 속에서 대답을 하는 사람은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대답을 할 때 그 사람은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지식과 이론이 지나가는 통로 혹은 지식과 이론이 머물다 가는 중간 역으로만 존재한다. 여기서 주도권은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지식과 이론에 있다. 대답의 공간에서는 ‘우리’가 ‘나’보다 더 강력하다
질문보다 대답을 위주로 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논의가 주로 과거의 문제에 집중하게 되어버리거나 진위 논쟁으로 빠져버린다.
질문은 이와 다르다. 질문이 일어나려면 우선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해야만 한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다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다. 자신에게만 있는 이 궁금증과 호기심이 안에 머물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 이것이 질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질문할 때에만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한다. 고유한 존재가 자신의 욕망을 발휘하는 형태가 바로 질문이다. 그래서 질문은 미래적이고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대답은 우리를 과거에 갇히게 하고, 질문은 미래로 열리게 한다
.흔히들 대답과 질문을 다른 두 기능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기능이 아니라 인격이다. 질문과 대답은 대립적인 한 쌍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두 행위다. 대답은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다. 한마디로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02 지 知 ? 창의와 상상이 작동되는 지성적 차원
왜 재미를 느끼지 못했을까? 그것은 박물관이나 갤러리의 높이와 내 시선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발산하는 높이와 보는 사람의 시선이 일치하지 않으면 거기서 재미가 생길 수 없다. 일치해야만 비로소 재미가 생긴다. 무엇을 즐긴다는 것은 그것이 발산하는 높이와 자신의 시선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유물들 하나하나는 눈에 보이고 만져지지만 그 유물들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동선은 눈에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다만 읽혀질 수 있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 이것 때문에 인간은 특별해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탁월함을 잉태한다. 인간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패턴을 읽는 능력 때문에 인간은 탁월해지는데, 이것을 읽은 사람들은 그 내용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 표현들이 인문학이 되기도 하고 예술이 되기도 한다
피아노 연주자에게 음악가 수준까지는 사실상 이미 있는 피아노의 기능, 이미 있는 음악 이론, 이미 있는 음악 체계를 구현하는 단계다. 이미 있는 길을 갈 뿐이다. 그런데 예술가는 아직 없는 길을 열어야 한다
03 상 峠(고개, 고비(가장 중요한 단계나 대목, 막다른 절정) -? 국가발전의 단계
건국의 틀도, 산업화의 틀도, 민주화의 틀도 이제는 모두 낡았다. 각자 자기 틀에 갇혀서 낡고 병든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핏대를 세우고 목소리를 높인다. 자기 틀로만 세계를 볼 줄 알지, 유동적 세계 안에서 미래를 향한 목표를 설정하는 지성적 능력을 보일 줄 모른다. 누구든 신념화된 자기 소리만 계속 해대는 사람은 일단 지적이지 않다. 이런 사람들에게 현혹되면 안 된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해서 고도의 추상적인 이론으로 구조화한 체계다. 하나의 철학이 생산될 때에는 구체적인 현실과 추상적인 이론이 함께 붙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수입될 때는 시대의 맥락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이론으로만 들어온다
우리는 보통 시대적 맥락이 탈각된 추상적 이론만 붙들고 있으면서 그것을 바로 철학으로 생각해버린다. 그러다가 철학자가 되지 못하고 전도사가 되어버린다.
04 사 思 ? 철학을 한다는 의미
반역자는 정해져 굳은 것에 답답함을 느낀 나머지 그것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반역은 기존의 것에 저항하는 것, 이미 있는 것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더 궁금해하는 일이다.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려는 도전, 이것이 반역의 삶이다. 모든 창의적 결과들은 다 반역의 결과다. 우리나라처럼 특히 훈고의 기풍으로만 채워진 상황에서 이는 더욱 절실하다
보통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 일의 가능성 여부를 먼저 따지려 한다. 그런데 그것을 따질 때 사용하는 논리나 근거는 무엇인가? 지금 이미 있는 것들인가? 아니면 지금은 없지만 다가올 것들인가? 우리는 분명 이미 있는 것들을 사용한다. 이미 있는 논리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따지거나 분석하면 결과가 정확하게 나오겠는가? 현재의 틀로 미래를 재단하면 미래가 제대로 열리겠는가?
꿈이 있는 문법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만드는 일이다. 인류를 번영시키고 인류에게 큰 영감을 주는 창의적 성취를 이룬 영웅들이 가능과 불가능 사이에서 시소를 탄 적이 있던가? 그들은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고유한 욕망으로 자기 인생을 채우지 기존에 있는 문법이나 논리로 그것을 해석하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그냥 건너갈 뿐이다
“나의 삶이 내 꿈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는가?”
3강 독립 獨立: 홀로 서다
01 이 理 ? 최초의 철학적 사유와 발휘
탈레스는 나일 강의 범람을 그 이전 사람들과는 다르게 설명한다
신들의 다툼으로 나일 강의 범람을 설명한다는 것은, 이 세계를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신들이 조종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달리 범람의 원인을 바람의 방향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생각과 관찰하는 능력으로 세계를 해석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생각하는 능력, 이것으로 인간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었다. 이 일을 탈레스가 최초로 했다
이전에는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지는 일을 포함하여 모든 일은 다 ‘신(하늘)’이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기나라 사람들은 이런 식의 믿음에서 벗어났다. 이제 세계 현상을 다른 틀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신의 뜻이 아니라 ‘기’ 내지는 ‘흙덩어리’라는 자연 현상을 근거로 설명한다. 기존의 믿음을 벗어나 인간의 독자적인 생각과 관찰의 능력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점점 사유의 주도권이 이동하고 있다
이런 추세에 따라 중국에서 하늘의 권위는 위축되고 인간의 주도권이 점점 커진다. 이런 사유의 이동 과정 속에서 특출하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노자와 공자다
공자가 한 생각의 결과들을 종합해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아마 이걸 것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공자 이전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하늘의 명령에 있다고 믿었다. 공자는 여기서 이탈하여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에게 있다고 할 때, 인간에게 있는 바로 그 이유 내지는 근거가 바로 仁이다. 공자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신에게 있다고 하는 그 믿음 체계를 벗어나서,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인간에게서 발견하였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말은 인간이 ‘믿음의 세계’에서 ‘생각의 세계’로 넘어왔음을 뜻한다. 중국 역사로는 이것을 天命을 벗어나 道의 세계로 넘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02 고 孤 ? 고독을 기반으로 홀로 선자
철학의 시작으로 인간은 신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이 핵심이다. ‘독립’은 기본적으로 혼자 서는 일이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만 책임성 있고 도도하게 우뚝 선다. 독립할 때 인간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바로 ‘孤獨’이다. 보통은 고독을 부정적인 의미로 보는데 부정적 의미에서라면 그것은 아마 외로움일 것이다. 외로움은 뭔가 결핍감을 느끼는 부정적인 상태다. 고독은 그렇지 않다. 고독은 아주 고아하게 혼자 서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힘만으로 서 있는 자립적 상태다
새로운 철학의 탄생이란 결국 이런 형식의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이다. 새로운 생각이 시간을 견디며 생존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또 믿음의 대상으로 바뀌고, 그 믿음의 체계가 다시 새로운 생각에 의해서 대체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기존의 익숙한 문법으로 보면 그것들은 다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이미 가지고 있는 판단 체계로 보면 다 그렇다. 하지만 그런 조짐이나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할 정도로 예민하면 그것을 이상하거나 나쁜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백지 상태에서 순순하게 호기심(궁금증)을 발휘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쓴 박훈 교수는 그 책 안에서 서양의 외압에 반응하는 일본의 태도를 ‘과장된 위기의식’이라고 표현했다. 강제 개항 등과 같은 일련의 압력에 대하여 일본이 실제 내용보다 훨씬 더 큰 위기의식을 가지고 과도하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민함이 좀 떨어진 문화권의 사람들 눈에는 제국이나 선진국의 예민함이 좀 호들갑스럽게 보이거나 지나치게 보일 수 있다
집단에는 그런 힘이 잠재되어 있다. 그래서 개별과 보편, 개인과 집단, 개별자와 공동체 등으로 나누어놓고 저울질하다 보면 당연히 무게중심이 보편이나 집단이나 공동체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집단은 대개’보편’이라는 탈을 쓴 이념의 지배를 받고, 그러면서 권위가 더욱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주체라고는 하지만 기실은 보편적이거나 집단적 이면에 종속되어 있다. 더군다나 내면화된 보편성은 우주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정치적 이념의 공유자들끼리 나누는 보편성이거나 진영의 좁다란 보편성이어서 그렇게 넓고 높지도 않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 가운데 가장 탁월한 능력은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줄 아는 것이다.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던 이질적인 것들에서 유사성을 파악한 후, 그 유사성을 근거로 상호 개방시켜 접속해 보는 일이 연결이다. 이런 활동을 총괄하여 ‘은유’라고 한다. 이 ‘연결’과 ‘은유’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03 시 視 ? 관찰과 몰입
관찰의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궁금증과 호기심이다. 호기심이 큰 사람은 관찰을 하고, 호기심이 작은 사람은 하지 못한다. 관찰을 유지시키는 힘, 그것이 바로 집요함이고 몰입이다. 인생의 승패는 자신을 이 몰입의 단계까지 집요하게 끌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좌우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휘하여 진실하게 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집요한 관찰을 통해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몰입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아주 높은 단계이다
04용 勇 -? 기존의 것과 불화를 자초할 수 있는 용기
‘변화’는 이 틀에서 저 틀로 넘어가는 일이다. 현재의 틀은 나에게 익숙한 개념과 문법으로 모두 번역되기 때문에 매우 선명하고 분명하다. 아직 오지 않은 세계 혹은 아직 열리지 않은 세계는 익숙한 개념과 문법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금 이 틀 안에 있는 사람에게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틀은 아직 암흑이거나 오리무중이다
어느 정도의 수양을 거치고 적당한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하나의 지향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인생을 거기에 투입해도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해보자. 그가 정말로 고려해야 할 무엇인가가 따로 있겠는가? 나는 따로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없다고 본다. 거기에 몰입하는 일 외에 따로 고려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책임지거나 감당하면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그것이 우연한 객기에서 나온 게 아니라 어는 정도의 단련을 거쳐서 나온 판단이라면, 그 다음은 좌고우면할 것이 없다. 그냥 하면 된다
이론은 사유가 아니라 사유의 결과물이다. 철학적 사유는 직접 세계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일이다. 사유의 결과물인 ‘이론’에 갇히면, 사유의 대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려는 용기가 약해진다. 철학적 사유 대상은 기본적으로 현실이고 당장의 세계가 아닌가
4강 진인 眞人: 참된 나를 찾다
01 창 創 ? 훈고의 기풍에서 창의의 기풍으로 이동
생각을 추적하고 그것을 이해하는 일은 인간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혹은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일이다
내 고유한 생각으로 내 삶을 꾸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이미 해놓은 생각의 결과로 내 삶을 꾸린다. 왜 이렇게 되는가?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이다. ‘따라하기’는 쉽고 편하지만 주도적으로 생각하는 일은 어렵고 힘들다
처음 만든 사람은 창의적 시도를 감행하면서 온갖 생각에 잠을 설치고 많은 불안을 극복하였다
자신의 개성을 유지하고 독립적인 삶을 사는 일은 이 ‘편안함’과 ‘안전함’에 빠지지 않고, 다가오는 불안과 고뇌를 감당하며 풀릴 길이 보이지 않는 문제를 계속 파고들어야 한다. 이것이 ‘지적인 부지런함’이다
대답으로 빠지는 일도 지적으로 게으르기 때문이다. 이미 품고 있는 지식과 이론을 요구에 따라 그냥 뱉어내기만 하는 일은 편하다. 이에 비해 질문은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만 할 수 있다
지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은 편한 길을 애써 피하고, 그 조짐의 의미와 방향에 대해서 부단히 숙고한다. 그렇기에 힘들고 불안하다. 힘들고 불안한 내면을 극복하고 계속 질문을 해대는 일은 지적으로 부지런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와 사회를 창의적이고 창의적인 기풍으로 채우는 일은 결국 나와 사회를 인격적으로 성수시키고 준비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식의 습득보다 인격적 성숙은 난이도가 훨씬 높다
02 살 殺 ? 기존의 가치관을 모두 벗어 던진다
왜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왜 수양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다시금 깊이 있게 생각하고 실천하려는 의지를 다잡아야 한다.
정해진 믿음 체계에 갇힌 사람은 평생 낡은 세상 한 귀퉁이를 잡으려 노력하거나 이미 낡아 빠진 것과 옳고 그름을 다투느라 정력을 소진한다. 하지만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개방적 자아는 낡은 것과 싸우는 데 정력을 쓰지 않고 새로운 것을 여는 일에 몰두한다. 어느 쪽이 자유이고 참된 삶인지는 이미 명확하다
03 덕 德 ? 나를 나로 만드는 힘
기성자가 닭을 이십일 동안이나 훈련시키고도 왕에게 아직 안 되었다고 말한 것은 닭이 자신의 힘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기보다는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행위를 고유한 자신의 내면에서 발동시키지 않고, 상대에 대한 반응으로 자기 행위가 발동된다는 것이다. 종속적 주체로서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우리의 삶이나 사고는 보통 이와 같다. 이런 흐름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경쟁이라는 것이다
경쟁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틀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들과 견주거나 다투는 일이다. 경쟁의 구도 속에서는 이미 정해진 틀을 바꾸는 일이 불가능하다. 경쟁은 오히려 이 틀 자체를 공고하게 만든다
그래서 경쟁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정해진 틀은 더욱 고착화 되고, 이 고착화된 틀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길을 여지없이 차단한다. 경쟁은 갈등을 너무 과하게 조장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기도 하지만, 더욱 부정적인 점은 치열한 경쟁이 틀 자체의 변화를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보가 어려워진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는 진보가 어렵다. 경재 구도 속으로 들어가는 한, 우리는 경쟁이 벌어지는 판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새로움, 고유함, 선도력은 시도되지 못한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경재 구도 속에서는 승리자도 패배자도 모두 행복하지 않고 피곤할 따름이다
자신을 자신으로 세우지 않고 자신 이외의 것을 자신의 상대로 세워놓는 한, 그 사람은 항상 경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경쟁하며 공생하고 있다. 공생하며 수준이 같아진다. 같은 수준에서는 앞선다 해도 겨우 조금 나을 수 있을 뿐이다. 조금 나은 수준이 약간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 때 그것을 1등이라고 하는데, 1등은 상대적으로 누구에 비해 높은 것이지 자기에게만 발현되는 절대적 높이가 아니다. ‘일류’는 절대적 높이를 보여주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합당해지는 칭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일등보다는 일류를 꿈꾸는 사람이다. 일등은 판을 지키는 사람이고, 일류는 새 판을 짜는 사람이다. 우리가 따라 하고 부러워하는 바로 그 단계다. 짜진 판 안에서 사는 데 만족하는 나라는 전술적 차원에 머무르고, 판을 짜보려고 몸부림치는 나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상승한다.
전략적 차원에서라야만 진정한 의미의 자유와 독립과 창의를 맛볼 수 있따
04 인 人 ? 참된 사람이 있고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
종속적 주체는 자신의 주인 자리를 신념이나 이념 혹은 가치관에 양보한 상태다. 그래서 진정한 자아와 자신을 이끄는 자아가 분리되어 있다. 이런 분리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발적이고 책임성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모든 영역에서 다 네 탓과 남 탓을 하느라 바쁘다.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보겠다는 자발적인 행동이 시도되지 않는다. 비판과 비난은 풍성해도 성숙한 자발성과 책임성은 매우 빈약하다. 이처럼 자아가 분열된 상태에서는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기 어렵다
심지어는 이놈의 ‘선례’와 ‘형평성’만 찾다가 모두 함께 말라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선례를 찾기만 하지 선례를 세우려는 도전을 하지 않는다. 이러다 보면 자기는 기존 논리를 넘어서서 압도하는 사람으로 서지 못하고, 계속 분석하고 비판하고 해석하는 사람으로만 남는다. 학술 영역에서도 비판과 해석만이 넘치고 창의적 도전이 취약하다
지성의 근본적인 힘은 지식의 두께나 이론의 깊이가 결정하지 않고, 궁금증이나 호기심 같은 원초적인 힘이 결정한다
진짜 주체는 감각이나 욕망 등과 같은 원초적인 문제를 담당한다. 사회적인 역할은 당연히 애써서 억지로 하는 경우가 생기지만, 원초적인 감각들은 자연적인 것이므로 강력한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때 자기 자신으로서의 주체는 요구르트에 더 기울기가 쉽겠는가, 아니면 조직의 보안을 더 중시하는 쪽으로 기울겠는가. 요구르트에는 자신이 밀착해 있지만, 정작 자신의 조직에는 밀착되지 않았다. 조직 체계 위에 별 의미 없이 떠 있는 부표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로써 자신의 일과 자신은 분리된 상태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신은 그저 그림자로만 존재한다. 그러하니 여기서는 어떤 예민함이나 민감함도 있을 수가 없다
‘직’은 자기가 맡은 역할이고, ‘업’은 사명 혹은 자아실현을 의미한다. 직업의 출현이다
직업이라는 말은 자신이 찾은 그 역할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감을 의미한다. ‘직’은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직’과 ‘업’은 일체다. 이 말은 자신과 ‘직’이 일체를 이룬다는 뜻이다. 이때 자신은 자신으로 살아 있다. 그 직업 안에서 자신은 행복하고 충족감을 느낀다. 당연히 민감성과 예민함이 유지된다. 몰입도가 유지되고 창의적으로 일을 처리한다
5강 문답 問答: 공유하다
01 논 論 ? 사유와 높이를 나누다
“이렇게 해도 될까요?”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라는 식의 질문이 더 질문다워 보인다. 질문에는 반드시 ‘자기 관찰’과 ‘자기 의도’가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
나의 입장을 부각시켜서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혹은 ‘나의 관점은 어떠하다’라는 의지를 선행시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어떤 공부를 하거나 연구를 할 때 그 공부 대상이나 연구 대상이 가지고 있는 방식이나 체계가 나한테 무엇을 주기를 바라는 것은 착각인 것 같다. 그보다는 진실한 나의 마음 상태 혹은 심리 상태가 오히려 더 그것을 정확히 보고 새롭게 보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지 않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때 비로서 장자가 한 말을 온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有眞人而後有眞知”, 즉 “참된 사람이 있고 난 다음에야 참된 지식이 있다.”
사람들은 보통 세계에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는 하지 않으면서, 세계에 내던져진다면 언제쯤 나올 수 있는가, 자신을 세계에 내던지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꼭 내던져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만 따지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 세월을 이렇게 보내지 말기 바란다. 행위 다음의 절차를 궁금해하기보다는 직접 무엇인가를 하는 편이 낫다. 실행하지 않고 궁리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저 멀리 뒤처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오직 자신과만 경쟁하라.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지만 자세히 살펴라. 맹자는 [맹자] (진심盡心 하下)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조건 책만 믿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 (盡信書則不如無書)
가족보다는 자신의 꿈을 먼저 생각하라.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 가운데 가족과의 조화를 의식하면서 자신의 일을 시작한 인물이 있던가? 각자의 지성의 높이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지 주변 사람들에 대해 고려부터 시작하지는 않았다
혁명이 완수되지 못하는 이유는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 먼저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새길 필요가 있다.
성숙괸 개인은 그냥 ‘개인’이 아니다. 성숙의 높이와 깊이는 이미 그 개인을 넘어서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격적으로 상당한 성숙에 이른 사람은 혼자가 아니고, 반드시 동조하는 사람이 생긴다(德不孤, 必有隣)
지식을 생산하는 입장에 서본 나라는 새롭게 마주하는 세계를 새로운 방법으로 대응할 줄 알기 때문에 계속 전진할 수 있지만, 지식을 생산하는 입장에 서보지 않은 나라는 계속해서 이미 소유하고 있는 지식을 변화하는 세계에다 억지로 (본인은 자연스럽다고 착각하지만…) 적용하니까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고, 당연히 전진이 더디거나 아예 어려워진다
02 공 共 ? 철학적 삶을 공유하다
지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지적 세계를 참세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진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적 체계는 모두 실재하는 세계를 비춘 것들이다. 그래서 주도권을 항상 세계에 두어야지 지식에 두어서는 안 된다. 지식에 주도권을 주는 한 고정된 지식 체계로 세계를 가두고 정지시키는 일을 할 수 밖에 없다. 지적 체계로 유동적 세계를 먹어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삶과 행운이 어긋난다면 그 어깃장은 어디서 나느냐? 학문을 하고 인격 수양을 하는 일에는 별로 집중하지 않으면서 통찰력이나 聖心 같은 선물이 덜컥 오기만을 기다리는 경우에 그렇다. 학문을 하고 인격 수양을 열심히 하면 통찰력이나 성심을 갖게 되지만, 학문을 하는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통찰력이나 성심을 가지려는 욕심만 앞세우면 통찰력이나 성심을 가질 수 없다
자유나 행복이나 선진 같은 것도 그렇다. 이런 것들은 다 선물이다. 행복을 추구하지 말라. 차라리 행복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좋은 습관이나 근면성을 기르라
종교는 기본적으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철학은 회의와 반성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이다
고도로 지적인 높이에서 세계의 흐름을 포착하는 능력으로 형성된 사유체계가 철학이다. 그리고 그 지성적인 높이는 그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의식과 연결된다. 우리는 철학의 역사 안에서 고도로 탁월한 높이에서 진행되는 사유의 일관된 흐름을 경험한다. 구체적인 시대와 유기적인 연관성 없이 돌출적으로 등장하는 고전이나 경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접하는 모든 철학적인 저작들은 어떤 철학자가 해놓은 생각의 결과물들인데, 보통 그 생각의 결과물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내면화하는 것을 철학 하는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철학 하기’일 수 없다. 생각의 결과들이 어떤 구체적인 세계를 토대로 형성된 것인지를 이해한 후, 지금의 세계에서 나에게 포착된 시대의 문제를 지정적인 높이에서 계속 생각해보는 것이 철학이다
생각의 결과를 배우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이다. 정해진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일 수 없다. 자기만의 진리를 구성해보려는 능동적 활동성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