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1995.07.20.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독서가 시작되었다. 국민학생이 꼭 읽어야 할 세계명작 50선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지경사에서 출간한 <로빈슨 크루소>였다. 내 나이 8~9살 때쯤이었다. 그 후 책은 내 친구가 되었다. 물론 최고의 친구는 컴퓨터 게임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사실 좀 비겁한 이유다. 책을 읽는 동안은 부모님께서 절대로 공부 안하냐고 야단치지 않았다. 시골 깡촌에 살던 나였지만, 아이템플 학습지를 할 정도로 부모님은 나에게 살아남을 길은 공부뿐이라 했다. 물론 학습지는 만화만 읽고 내 손을 떠났다. 방 한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쌓여만 갔다. 하지만 (다들 그렇지만, 다행히도) 공부는 재미가 없다. 그래서 면피용으로 책을 선택했다. 더불어 책을 읽는 동안 깡촌에서 지내는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잔소리도 피할 수 있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으랴.

다만 아쉽다면, 깡촌이다 보니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넉넉지 못한 집안사정도 한 몫 했지만, 지금처럼 도서관이 많았다면 내가 더 책을 읽었을까? 간혹 자문해 보기도 한다. 1년에 사는 책이라 봐야 10권 미만이었다. 평소 용돈이 없었던 나에게 설날 세뱃돈이나 오랜만에 만난 친척 분들이 주신 쌈짓돈을 모으고 모아서 책을 샀다. 지금 생각해보면 쓰레기(?) 같은 책들도 많이 샀다. 정말 쓸데없는 책이었지만, 그래도 내 호기심을 채우고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하는데 책은 항상 만점짜리 친구였다. 그런 친구 있지 않는가. 늦게 집에 들어가게 되어서 야단을 들어야 하지만, 같은 반에 공부 잘하고 잘생기고 착한 친구와 함께 있다고 왔다고 하면 부모님이 수긍하고 다음에 한번 집에 데리고 와라~ 라고 말하는 친구. 책은 그런 친구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비슷하다. 취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 주말이나 퇴근하고 뭐하냐는 질문, 자기계발(개발)은 하니 같이 답변하기 애매한 질문들이 쏟아질 때면 으레 책을 읽는다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수긍해버리고 더 이상 말을 걸지 않는다. 아마도 내 얼굴이 정말 책을 읽게 생겼나 보다. 아니면 너무 진지충이었거나. 어쨌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면피용치고는 너무 많은 책들을 사게 되었다. 어릴 때는 책을 살 돈이 없었고, 조금 커서는 책을 둘 공간이 없었다. 지금은 책을 읽을 시간과 체력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꾸준히 사고 읽으려고 애쓴다. 책은 언제나 나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니까. 그리고 그 핑계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 준다(물러서 준다고 표현해야 할까). 이렇게 좋은 친구인데, 내가 어찌 친구를 박대하랴.

오늘도 만나지 못한 친구들을 보면 미안스럽다. 게을러서. 아무래도 의도가 불순해서 그렇겠지. 그래도 착한 친구다. 앞으로도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YBLOGWEB2